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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몬까치 Nov 24. 2021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한의원과 지업사

엄마의 옷에는 늘 한약 냄새가 배어있었다. 이모네 한의원에서 25년을 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짠내 나는 바다가 가까운 인천의 구석진 동네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시멘트 건물의 1층에는 000 한의원이라는 간판이 아직도 걸려있다. 그렇지만 그곳에 더 이상 엄마는 없다. 올해 초에 환갑을 맞이한 엄마는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쳤던 한의원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그간 일했던 것에 대한 보상은 몇 달간 제공되는 백여만 원 남짓의 실업급여뿐이었다.


1999년의 어느 겨울날, 아빠는 1997년 시작된 IMF 외환위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엄마와 연애 때 만나 잘 다니던 방직공장을 그만두고 도배일을 해오던 고모의 건물 1층에 지업사를 차렸다. 우리 집은 이제 더 이상 깔끔한 12층짜리 아파트가 아니라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하고 낡은 건물 안에 있는 가게에 딸린 작은 공간이었다.


서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인천에서 나름 학구열이 있고 괜찮은 동네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낸 나에게 있어 새롭게 이사 온 곳은 정말이지 별로였다. 1층 가게 안의 방은 천장도 낮고 화장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심지어 내 방은 가게 밖으로 나와서 좁디좁은 2층의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2층 집에서 마음에 든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내 방에만 있던 다락방이었다. 창문 옆에 작은 문을 열고 올라가면 나만의 보물 창고가 생긴 것 같았다. 동생 방에는 없는 이 공간을 특별하게 활용하고 싶었지만, 결국 보기 싫은 물건들을 쌓아놓는 공간으로만 사용하게 된 점이 안타깝다. 아빠는 가족들을 위해 특유의 손재주로 화장실과 문도 새로 수리하고, 가게에서 팔아야 할 버티컬(기다란 직사각형의 플라스틱을 연결하여 창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도록 만든 가림막)도 다는 등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그 집에서 5년 남짓을 살았다. 나와 동생 모두 5분 거리에 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다. 엄마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한의원을 다녔고, 아빠가 사업 수완이 썩 좋은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묵묵하고 성실하게 가게를 지켜왔다.


2003년 12월 평소와 다름없던 겨울날, 날이 추워 그 작은 단칸방에 보일러를 아빠의 표현대로 '이빠이' 틀어놓은 덕분에 아주 훈훈한 방구석에 누워 있었다. 여름에는 그래도 2층에서 곧잘 자곤 했는데, 겨울이 되면 날이 추워서 외풍이 아주 심한 내 방 침대에서 자기보다는 네 가족이 오순도순 1층 방에서 함께 자곤 했다. 그날 밤 엄마는 할아버지 병원에서 간병하느라 밤을 새우느라 집에 안 계셨고 동생과 나, 아빠 셋이서만 집을 지켰다.


그날 밤에는 '열린 음악회'인지 '강변가요제'인지를 보았다.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하고 싶은데 기억이 잘 안나는 내가 참 싫어진다. 그 음악방송에 누가 나왔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추운 겨울날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빠와 함께 봤던 따스했던 기억만 어렴풋이 있다.


다음 날 아침, 한의원 큰 이모의 부탁으로 아빠는 서울의 청담동 맛사지샵에 새벽부터 나갔다. 큰 이모는 한의사로 일하는 남편 대신 뭐 옮길 게 있으면 꼭 아빠의 커다란 스타렉스 차를 요구하곤 했다. 처형의 난데없는 주말 요구사항에도 지칠 만도 한데,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호인인 우리 아빠는 '서울에 다녀올게. 갔다 금방 올 거야."라는 말을 남긴 채 새벽부터 떠나셨다. 잠결에 가게와 방을 나누고 있는 버티컬을 걷으며 인사를 하고 나가시는 아빠의 모습을 얼핏 보았다. 나는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고 싶었지만 잠에 취해 눈을 감았다.


2003년 12월 12일.

그렇게 서둘러 나간 아빠는 그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빠가 쓰러졌단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향하던 지하철 속에서 전해 들은 비보. 목 놓아 울던 날, 차디 찬 아빠의 얼굴, 엄마의 울부짖음, 눈물을 겨우 삼키고 있는 동생의 모습 등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들춰내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뒤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업사 우리 집을 정리하고 서둘러 아파트로 다시 이사를 했다. 남편을 잃은 작고 여린 한 여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나는 오랜 시간 울었다. 이 책이 내가 살아왔던 집들을 모두 불러냈기에." 여성학자 정희진, 에세이스트 김하나가 추천한 이 책을 보고 내 안에 담아둔 채 추억 속에 고이 묻혀 둔 집에 대한 기억을 꺼냈다. 일생에 걸쳐 지나온 집과 방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 것을 보고 나도 한 번 적어보고 싶어졌다. 적다 보니 너무 무겁고, 진지해진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먼 산..) 언제부턴가 '집'을 부동산적 가치, 재테크의 수단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세태가 씁쓸하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온 집에 관한 추억을 잠시 마나 떠올릴 수 있어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빠, 엄마, 동생과 함께했던 질곡의 시간이 벼락처럼 끝나버린 듯하다.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자리를 점유하는 일'이라는 책 속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만큼이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하는 물음도 중요하게 느껴진다.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집에서의 내 자리'를 인식하는 일임을 잊지 않기로 다음에도 또 적어봐야지.


책 속의 한 구절로 마무리

"난곡의 안쪽을 바라볼 때마다 '여기'가 최악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저기'로 굴러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저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저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서나마 쫓겨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그 절박함 앞에서 느끼는 안도와 불안이 부끄러웠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라이프앤페이지, P59)
출처 - 인터넷 신문 인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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