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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게인3의 25호 가수가 독특한 가창력으로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부릅니다.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소설가 전상국 선생님은(제 주례 선생이지요. 주례로서는 첫 등장) 홍천 내면 물걸리 출신입니다. 마을 이름만 들어도 벌써 시골 냄새가 푹푹 나는 산골입니다. 대학 다닐 때라고 합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집에 왔다가 서울 가려고 춘천까지 걸어갈 참인데 이웃이 자기 친척 여자아이를 데리고 가 달라고 하더랍니다. 여고생 혼자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게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두 사람은 춘천까지 타박타박 걷기 시작합니다. 한여름의 땡볕. 먼지 나는 시골길을 나란히 걷는 게 아니라 대학생은 앞서고 여러 걸음 뒤에 여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따라갑니다. 조신한 모습. 일종의 ‘내외’인데 그게 70년대의 예법이었습니다.
대학생은 그녀의 이름도 몰랐다가 나중에 그녀가 파격적으로(당시로서는) 가죽바지를 긴 다리에 짝 달라붙게 입고, 과격할 정도로 춤을 추며 열창하여 당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가수 김추자임을 알고는 놀랐다지요(얼마나 파격적인지 꼭 너튜브를 찾아보시길. 90년대가 아니라 70년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김추자가 아니라 25호 가수의 멘트입니다. 오랫동안 노래를 해왔으나 정작 본인의 이름보다 팀 이름만 알려졌기에 이참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내건 자신의 소개문도 ‘반만 가수다’입니다. 여기서 25호의 ‘존재감 없음’을 읽습니다.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망은 ‘나 잘났다’가 아니고 ‘존재’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싱어게인에 나오는 출연자 대부분 ‘존재 없음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다가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쪽팔림도 감수하고 출연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대부분 ‘존재’를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존재 없음’에 다름 아닙니다. 그악스럽게 돈을 모으고, 심지어 사기까지 치는 것 역시 존재를 나타내기 위한 행위며, 돈으로 존재를 뽐내기 위함일 것입니다.
자기 글을 쓰레기라며 발표하기를 머뭇거렸던, 그리고 많은 작품을 불태운, 수줍음 많았던 프란츠 카프카도(앞으로 카프카를 많이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야말로 우울증의 대명사 같은 작가니까요) 자신의 존재를 말하려고 발버둥 친 인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SNS를 하고, 유튜브를 하고, 댓글을 달고, 브런치에 글을 발표하는 것도(나 역시) 결국은 존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니체 씨. 아마도 니체 씨가 매번 책에서 그렇게 목청껏 소리를 높인 것 역시 존재를 나타내려 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아닌가요?).
이 세상에 왔으면 자신의 존재를 남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나 여기 있소!” 소리치는 것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임재범 씨가 다른 가수를 평하면서 “문을 열고 나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몫”이라 고 한 말에 동의합니다.
우울증을 이겨내려 하고,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문을 박차고 나오는 행위입니다. 개인적으로 싱어게인을 흥미 있게 지켜보는 것은, 문을 박차고 나오려는 출연자들의 그 처절한 몸부림에서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덧붙임 / 내외하던, 조신한 모습과 가죽바지 입고 신중현의 밴드에 맞춰 열창하던 김추자. 어느 쪽이 본 모습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열창은 결국 그녀 나름의 문을 박차는 행위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