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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 Pul Mar 28. 2024

니체 씨, 오늘은 안녕하신가요?_품격

# 24 -  죽음의 품격

# 23 – 품격     


 니체의 글은 목소리 톤이 높아서 늘 화난 사람처럼 여겨진다. 예언적인 아포리즘의 문장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당대를 답답하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시대를 앞선 주장을 하고 있으니 말하는 투가 조분조분 할 리 없다. 그럼에도 그의 문장은 품격이 있어 독일 교과서에 모범문장으로 실리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20세기, 21세기... 하루가 다르게 광속도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모든 게 편리해지고,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누구 말대로 기술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신기술에 ‘추격’당하고 이다. 모든 면에서 속도가 빠른 젊은이들도 더러 곤혹스러운 모습을 보이는데, 하물며 노인 반열에 드는 사람들이야!

 

 날로 발전하는 기술에 비해 우리 자신의 품격, 인감의 품격은 자꾸 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신기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다. 주식, 부동산, 가상 화폐 등 관심은 온통 돈에 쏠려 있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아니더라도 행복으로 가는 길목에 돈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 탓이리라.

 아무리 선거철이라고 해도 이쪽이나 저쪽이나 품격은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경제는? 문화는? 인간으로서의 품격 그러니까 인격을 ‘도야(陶冶)’하는 학교는 또한 어떠한가. 4지 선다형으로 문제를 빨리, 잘 푸는 인간을 생산하는 학교에서 인품에 관한 그 무엇을 추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동물이고 식물이고 생명체의 최고 목적은 종족 보존과 번식이랄 수 있다. 인간도 동물이므로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은 인간의 종말, 종족 보존의 종말을 고하는 전조로 볼 수밖에 없다. 인류 숫자의 증가나 현 수준 유지는 기술 발전에 기대할 일이 아니다. 경제 문제로만 볼 것도 아니고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그건 죽음에 대한 인식, 죽음을 대하는 자세 아닐까 한다.      

  

 80이 넘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프랑스 작가 클로디 윈징게르는 그의 소설 <내 식탁의 개>에서 “늙는다는 건 경험해 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한 발짝씩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죽음의 문턱을 넘는 노년의 세계, (그리고 폭넓게 생각해서) 인생 전반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이며, 탐험이며, 성취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적을 말살하려는 것인가. 진심인가. 진정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이 좋겠는가. 적은 말살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적이 당신 안에 영원한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가?” - <아침놀>에서     

 

 니체의 이 말을 적용하면, 타인에게 품격 없게 대하면 우리 안에 품격이 없고, 품격 있게 대하면 품격 있는 사람이 된다. 당연히 죽음에도 마찬가지. 억지로, 마지못해 죽음을 맞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죽음을 ‘기대’할 때 인간의 품격이 살아나고, 각 개인의 삶에서도 품격이 생기리라 믿는다. 이게 시골의 깊은 밤에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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