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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풍뎅이 시인 Mar 26. 2018

나는 용서한다

던져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쓰기 트레이닝



나는 용서한다. 누군가 용서를 구해서는 아니다. 물론 허락하여 준 일도 없다. 용서에도 상대의 허락이 필요할 수 있다. 나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란 까다로운 것이다. 크고 작은 잘못은 있을 수 있지만 용서라는 말의 무게는 엄중하다. 당신을 용서해도 될까요. 정중하게 물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하다. 용서를 필요로 하는 정도의 죄를 짓는 일은, 사실 그리 흔치 않다. 도저히 용서를 할 수 없거나, 용서까지는 필요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서 은밀히 일어나는 용서를 알아챌 이는 없을 것이다. 용서를 하여도, 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용서할 수 있다.  

 

 사실은 용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벌을 하는 일은 요원하고 저주로 심신을 소진하는 쪽은 항상 이편이다. 어떤 날에는 - 간밤에 뒤척인 탓에 신경이 곤두섰다거나 우중충한 날씨로 인해 기분이 덩달아 처졌다는 둥의 흡족한 사유도 댈 수 없는, 그저 어떤 날 - 그냥 화가 나는 것이다. 일찍 왔네, 하는 말이 어쩐지 기분이 나빴는데 저의가 무엇이냐며 찾아가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사실 나의 잘못이다. 해서 상대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을 용서해도 될까요. 용서하게 해주세요.   

  혼자 행하는 용서가 썩 고상한 일은 아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며 읊조리는 것은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소름 돋는 일이다. 결국에는 자기위안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처연한 과정이 용서의 민낯이다. 그것은 어쩌면 용서가 아니지만, 나에게는 용서여야 한다. 그런 용서는, 여름밤 한참을 풀썩이며 잡은 모기를 잘 살아보라고 놓아주거나, 앞뒤 사정없이 머리를 들이미는 차량을 너그러이 끼워주는 일과 같은 수준이지만, 나로서는 사형수에게 새로이 삶을 선고하는 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한없는 아량이자 포용이고 배포이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 일도 있다. 역시 먼저 용서를 구해온 일들은 아니다. 다만 용서할 수 없다는 주문을 통해 내 스스로 당당해지는 것이다. 버리려면, 용서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 엄중한 단어를 구할 정도의 죄가 맞느냐고 묻는다면 침묵할 것이다. 용서할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않기 위해 이미 생의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곧 용서이다. 그래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모기나 파리를 용서하고, 의미 없는 이들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일을 앞세워 숨기는 것이다. 내가 이렇듯 용서에 뛰어난 사람인데, 그것은 분명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곱씹게 되면 용서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결국 없다는 것이 더욱 명확해질 뿐이다. 그래서 모른 척, 나는 또 용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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