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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풍뎅이 시인 Aug 03. 2018

에어컨이 없던 여름

진짜 여름


 

 작년까지는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났다. 이제 그것은 실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느껴진다. 에어컨이 없는 여름이라니. 작년 여름도 올해 못지않게 더웠다. 그러나 대부분의 날은 에어컨 없이 견딜만했다. 낮에는 회사에 있었고 저녁의 더위는 버틸만 한 것이었다. 에어컨이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여름이란 으레 그런 것이다. 미치도록 더운 것. 

 휴직했던 해의 여름에는 집에서 계절을 오롯이 겪었다. 작은 방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오후 2시가 넘으면 등줄기에서 정말 한 줄기의 땀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 그제야 책을 챙겨 카페나 도서관으로 나가곤 했다. 지금도 믿기지가 않지만 그 순간의 방 온도는 매번 36도였다. 배꼽시계처럼 내 몸에는 온도계도 달린 것 같아 신기했다. 더울 때는 샤워를 하는 것이지 에어컨을 찾는 것이 아니다. 다림질용 물뿌리개에 미적지근해진 수돗물을 담아 허벅지와 팔뚝에 뿌리면 시원했다. 물을 적신 수건을 대충 짜서 배 위에 올려놓고 뜨듯해지면 다시 새로운 물을 적셔가며 잠에 들었다. 그것이 나의 일상적인 여름 나기였다.

 그러나 지난여름 막판 열흘에서 2주 정도의 기간은 여느 여름과 다르게 정말 버티기가 힘들었다. 낮동안 고르게 잘 달구어진 집에서 그나마 가장 온도가 낮았던 부분이 마룻바닥이라 우리는 퇴근 후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최대한 몸의 많은 부위가 마룻바닥에 닿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몸의 양면은 결코 한 번에 바닥에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바다표범처럼 굼뜨게 움직이며 바닥의 시원한 부분을 찾아 꿈틀꿈틀 이동했다. 일주일 정도 동네 모텔에서 출퇴근을 하는 것이 어떨까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역시 비용의 문제로 포기했지만) 주말에는 낮동안 집에서 버틸 수가 없어 동네의 가장 시원한 카페로 가 가장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런 대피는 길어야 세 시간이었다. 눈치가 보이고 좀이 쑤셨다.

 '지침'이 그 시기의 우리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였던 것 같다. 우리는 더위에 지쳤다. 시들어가는 부추 같았다. 시들시들하다 녹아 문드러져버리는. 마지막에는 궁여지책으로 쿨매트라는 것을 구매했는데 잠깐 시원하다가 그 역시 체온으로 달아올라 결국에는 뜨뜻하여지는, 그런 서글픈 제품이었다. 우리는 그저 축 늘어져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디서 기사를 봤는데 우리나라의 에어컨 보급률이 80%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마도 하위 20%의 삶을 살고 있었나보다. 언제 그렇게 에어컨들을 샀을까. 내 사전엔 에어컨이 사치품인데 언제 그렇게 다들 부자가 되었을까! 나는 그제야 내년에는 에어컨을 사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올해 3월 잠깐 무더웠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번뜩 정신을 차리고 에어컨을 들였다. 필수 기능만 있는 가장 저렴한 모델로 구입했지만 설치비가 20만 원이나 들었다. 1년에 2주나 3주, 길어야 한 달 쓸 물건을 이렇게 거금을 들여 사야하는지는 계속 의문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집에 365일을 떡하니. 7월에는 퇴근 후에 1시간 정도 에어컨을 돌렸다. 요사이 일주일은 더위때문에 새벽에 자꾸 깨는 바람에 잘 때도 켜놓고 자고 있다. 작년 여름은 끔찍했지만 그래도 지나고 생각하니 나름의 여름다운 재미가 있었다. 에어컨이 생기니 여름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겠다. 문을 꽁꽁 닫고 있으니 창 밖의 매미 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다. 출퇴근도 차로 하니 더욱 그렇다. 점심시간에 반짝 작열하는 태양 속을 양산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며 살이 탄다고 덥다고 숨 막힌다고 법석을 떨며 여름을 상기시켜 볼 뿐이다. 고작해야 하루에 10분, 20분 여름을 마주한다. 이번 주만 지나면 에어컨을 다시 끄고(내 돈....) 선풍기를 틀어 여름을 실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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