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송이 Oct 21. 2021

건조기, 신세계를 맛보게 해 주다

건조기는 사랑입니다.

건조기는 내게 사치품이었다. 넷째를 낳기 전까진. 수정 언니도 영미 언니도 건조기를 사니 너무 편하다고 말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난데없는 반발심이 일었다. 게을러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빨래 너는 행위가 얼마나 큰 노동력을 요구한다고, 그것도 안 하려고. 점점 세상은 편해지고 사람들은 게을러지는구나, 라는 건방진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약간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면이 있다.


넷째를 낳고 한 달 동안 산후조리를 하고 집에 돌아오니, 집안일은 온전히 내 차지였다. 내 몸뚱이도 정상이 아닌 데다 신생아 아가 하나만 돌보는 것도 힘든데 내겐 돌봐야 할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든 집안일을 최소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바로 그 건조기가 생각났다.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건조기 살까요? 요즘 애 키우는 집에 다 있다던데...”

“그래요. 나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번 주말에 보러 갑시다.”


남편은 이번에도 흔쾌히 수락했다. 넷째를 낳고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늘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다 들어주려고 애쓰는 그의 마음이 보인다.


주말이 되자마자  우리는 시내에 있는 하이마트로 달려들었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건조기를 향해 돌진했다. 생전 처음 보는 건조기 앞에서 나는 발길을 멈췄다. 드럼 세탁기와 닮았다. 사는 김에 식구도 많으니 가장 큰 것으로 사기로 했다. 다음 날, 집에 건조기가 배달되었다. 세탁기에서 빨려 나온 빨래를 널지 않고 다시 기계 통 속에 집어넣는 일, 내겐 낯선 경험이었다. 두 시간 후, 건조가 다 되었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달려가 문을 열었다. 따끈따끈하고 보송보송한 빨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통방통한 물건 앞에서 나는 자꾸만 웃음이 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고개를 삐죽 내밀고는 육중한 몸매를 뽐내며 든든히 선 요 고마운 물건에게 애틋한 눈빛을 발사했다.


‘세상에, 이런 물건이 세상에 나오다니, 이런 건 누가 발명한 걸까? 분명히 주부일 거야, 주부가 아니라면 적어도 주부의 마음을 너무도 잘 헤아리는 남자 사람쯤?’


따끈한 빨래를 가지고 와서 개면서도 이런 생각들을 하며 혼자 실실 웃다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건조기가 있는 세상, 완전 신세계예요. 주부로서의 내 삶은 건조기 있는 삶과 없는 삶으로 나뉠 것 같아요.”

“그렇게 좋아요?”

“네. 완전.”


'띠띠띠띠' 현관문이 열리고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남편 손을 낚아채  우리 집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큼지막한 건조기 앞으로 데려갔다. 이 물건이 얼마나 신통방통 한 지에 대해 침을 튀기며 다시 한번 이야기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이렇게 좋아하니 자기도 좋다고 했다.


쓰면 쓸수록 편하고 좋다. 빨래를 널 필요도 없고 두 시간만 기다리면 다 말라서 나온다. 건조는 기본, 살균과 소독은 덤이다. 며칠 후, 남편에게 “여보, 한동안 우울해서 산후 우울증인가 하고 걱정했는데, 이제 괜찮아요.”

라고 말하자 남편이 말했다. 그거 다 건조기 덕분이라고. 맞다. 건조기가 내 집안일을 덜어주기 시작하면서 발을 덜 동동거리게 되었다. 직접 간 원두로 커피를 내려 마실 여유도 조금씩 생기면서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그렇다면 우리 남편은 정말 현명한 사람이다. 아내의 마음 살뜰하게 챙기며 돈을 쓸 곳에 쓸 줄 아는 사람이니까.

이전 11화 이래도 저래도 엄마는 불안하다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괜찮냐고 마흔이 물었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