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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이 Oct 26. 2021

엄마도 처음부터 포근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

엄마가 쓰는 반성문


 첫째 민아는 넷째가 뱃속에 있을 때, 그 아이가 여자이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다. 이미 있는 남동생 두 명은 자신의 삶에 무용한 존재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용히 내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누나 삶을 늘 흐트러뜨리고 방해하기 바쁜 남자들이 정말 싫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미 있는 남동생들도 어쩔 수 없이 떠안고 살고 있는데 거기다 남자 동생 하나 더해지는 것은 큰 애에겐 악몽이었고 여동생이 생긴다는 건 참혹한 현실에 동지가 생긴 듯 든든하고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넷째가 딸이길 바란 건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아들은 두 명이나 있으니 딸 둘 아들 둘이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초음파상에서 보이는 뱃속 아가는 아들임을 당당히 밝히고 있었다. 가랑이 사이로 보이는 조그마한 그것이 자신의 성별 증명을 확실히 해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말이 없어진 우리 부부는 잠시 후 마음을 다스린 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들도 좋아요. 민아는 많이 서운해하겠지만 막내 입장에선 아들이 이어야 바로 위 형아들이랑 잘 놀 수 있고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이런 대화를 하며 서로의 마음을 다독였다.


문제는 민아가 하교하면서부터 였다. 엄마가 오늘 산부인과 가는 걸 아는 민아가 학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자야 남자야?"

"민아야, 남자 아이야."

라는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왜 남자야? 난 어떡하라고... 난 여자 동생 원한단 말이야. 남자 동생은 이미 두 명이나 있잖아, 나만 혼자 여자잖아."

잠시 괜찮아진 듯하다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어떡해.. 친구들한테도 여자 동생 생긴다고 다 말해놨는데 왜 남자냐고?"라고 말한다.

"민아야 민아야 남자아이 여자 아이는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주시는 대로 받는 거야."

내가 아무리 말해도 민아는 달래지지 않는다. 시간이 좀 지나야 할 것 같아 그냥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민아가 진정된 듯했다. 남동생 둘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자 힘없는 목소리고 동생들한테 말한다. "얘들아, 축하해. 남동생이래." 남자 애들은 아직 어리기도 하고 지들이 남자들이라 별로 관심도 없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여자 아이였음 좋았을 텐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딸 하나에 그 밑으로 줄줄이 아들 셋. 부모에겐 딸이 하나라도 있어서 참 감사한 일인데 그 딸은 얼마나 힘들까

 둘째가 태어나기 전 오롯이 혼자였던 2년 이란 시간을 빼면 그 아인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남동생이 한 명씩 늘어가는 고통을 안고 살았다. 그래도 셋째까지는 나도 어찌어찌했었던 것 같다. 그땐 딸아이도 아직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라 손도 덜 가고 성격도 덜 예민하고 말이다. 아홉 살 딸아이가 벌써 사춘기인가 싶을 정도로

예민하고 내가 보기엔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동생들이랑 싸우고 소리 지르고 울고 왜 저러나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난 그 아이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보단 '저 아인 정말 누굴 닮아서 저렇게 예민하지'

하는 마음이 앞섰다. 난 사실 딸아이 마음을 진심으로 토닥여 주는 따뜻한 엄마가 아니었다.

덜렁대고 호탕한 성격이 아들 키우기에 더 최적화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감정선이 복잡 미묘한 딸아이 육아가 힘들다고 느끼고 있다. 더군다나 넷째가 어리다 보니 그 감정과 마음을 토닥거리면서 이해해주고 보듬어 줄 여력도 없다. 늘 딸아이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넷째가 태어나고 민아는 아홉 살 나이에 남동생 세 명을 둔 누나가 되어버렸다. 내가 지금도 네 명을 키우는 엄마란 삶이 무겁고 버겁듯이 민아도 남동생 세 명의 누나로 사는 삶이

버거운 모양이다. 그리고...... 민아는 매번 아가만 낳는 엄마가, 더군다나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 남자아이만 낳는 엄마가 더 이상 포근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늘 아가에게 매달려서 따뜻한 손길 한 번 주지 않는 엄마가 미운 모양이다.


오랜만에 들여다본 민아의 국어 시험지 앞에서 엄마를 향한 민아의 마음을 보고야 말았다.


첫 장을 보고,

약간 씁쓸했다.

      

포근하면 아빠...

어?

엄마가 아니라 아빠네....

그...... 그래

그럴 수 있지 뭐

아빠가 나보다 더 다정다감하고

살뜰히 마음을 알아주니

포근하다 느낄 수 있지....

뒷 장을 보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음 중 이 노랫말의 빈칸에 들어갈 수 없는 말은?

 이 말은 즉

다음 중 포근하지 않은 것은? 이 아닌가.....

민아는 정답을 엄마를 골랐다.


처음엔 충격이다가

슬프다가

반성이 되다가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민아를 불렀다.


이게 어떻게 된 거 나고 따져 물으려다가

그럼 또 싸우게 될 것 같아

최대한 친절하게 민아의 마음으로 파고들으려 애썼다.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민아의 진의가 몹시 궁금했다.


"민아야 아빠가 엄마보다 포근하다는 건 알겠어.

그래서 여기에 아빠라고 쓴 건 이해해. 근데 두 번째 문제에게 포근하지 않은 걸 고르라는 데 엄마를 고르다니 너 진짜 엄마를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민아는 약간 웃으며 "맞잖아" 한다.

조금 있다가는 아니라면서 농담이라며 약간 눈물을 보이면서 문제가 그런 뜻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일단은 민아에게 이것에 관해 엄마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글로 풀어야 엄마 마음이 풀릴 것 같다 했다. 처음에는 시험지 촬영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던 민아도 자기가 엄마 마음 슬프게 했으니 사진 찍는 걸 용인해 준다. 그러면서 진짜 문제를 찬찬히 안 읽어서 진짜 몰라서 그랬으니 마음 풀란다.

난 지금도 헷갈린다.

진짜 몰랐을까 우리 딸.

몰랐을 거야....

그럼 몰랐지...

이렇게 생각해야

내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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