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그때 거기 프로젝트

by 강이람

베란다 2020703


“부자”라는 개념은 몇 살 즈음 생기는 것일까?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그 감정은 도대체 우리 마음 속에서 언제부터, 어떻게 설계되는 것일까. 내가 부자라는 개념을 인지한 때를 정확히 기억한다. (운 좋게도, 혹은 우습게도)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보다, 우리 집은 부자구나, 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때가 국민학교 4학년, 서울 변두리 끝자락에서 살다가 서울 중심부 끝자락의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였다.

“얘들아, 이제 집에 엘리베이터를 타야 해”라고 아빠가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 갈 때 덜컹덜컹 하는 약간의 흔들림에도 긴장이 되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간 새 집에는 전에 살던 집과는 다른 베/란/다/가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와, 우리집 부자구나.


베란다에 서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콩알 만했다. 알록달록한 놀이터 미끄럼틀과 주차장의 자동차들도 레고처럼 귀엽게 작고 아기자기 했다. 비가 오는 날 동그란 우산들이 동동 떠다니는 것도 신기했고, 쓰레기 수거 트럭이 장난감처럼 오가는 것도 신기했다. 비행기 위에서나 볼 법한 이런 신기한 풍경을 볼 수 있다니, 너무 신기했다. 전에 살던 동네의 친구들을 다 데리고 와서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그 감격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창 밖 대로변에 오가는 자동차 소음과, 볕이 충분하지 않은 아파트의 구조, 느려터진 엘리베이터에 화가 났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베란다에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부자의 상징인 베란다는 내 머리 속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가지고 있는 내 테이프를 다 CD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게 부자지, 라고 생각한 것은 대학교 때였다. 원하는 곡을 찾아 헤매지 않고 바로 >> 버튼을 눌러 찾을 수 있는 간편함에 감격하면서 한 장 한 장 CD를 사 모으며 나는 다시 부자가 되었다.


사회 초년생 때는 “비즈니스석을 주저없이 탈 수 있었으면”하고 생각했다. 꾸역꾸역 돈을 모아도 매번 이코노미석을 탔던 대학생 때와 달리 삼십 대부터 가끔씩은 비즈니스를 탈 수 있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올 때도 그랬고, 여름 휴가 때 남편과 비즈니스 1석, 이코노미 1석을 예약해서 자리를 바꾸어가며 탄 적도 있었다. 하늘 위에서 허리를 180도로 펴는 사치를 누리려면 지금도 큰 결단이 필요하지만, 어쨌든 마음만 먹으면 잠시 부자가 될 수 있다.


애를 낳고 나서는 “평생 매 주마다 청소 도우미를 쓸 수 있다면 부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정도의 비용은 쓸 수 있지만, 그 말 속에는 그 비용을 지불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때 격주에 한번씩 청소 도우미의 도움을 받았으니 50% 정도는 부자였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왔을 때 반짝반짝해진 살림살이를 보면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꽉 찬 100%의 부자였다는 점에서 행복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아닌, “부자가 되었다”라는 충족감을 쉽게 느끼던 11살 때의 지혜를 잃지 않고 싶다. 작심삼일이면 3일마다 결심하면 된다는 누군가의 주장처럼, (나는 좀 다른 부자들과 다르게) 자주 바쁘게 새로운 부자가 되어간다는 점이 다를 뿐 부자는 부자라고 주장하고 싶다. 시원한 베란다에 앉아 전지적 시점으로 만족스럽게 있던 그 미소와 으쓱함을 유지하고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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