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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Jun 27. 2024

무대는 찢으라고 있는 것

여러분을 제 공연에 초대합니다

* 인물 사진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거나 극단 인스타에 공개된 것만 사용합니다.


신입 발표회는 극단 내부 공연이었으므로, 객원 한 분을 제외한 모든 관객이 극단의 단원이었다. 즉, 일반 관객과는 다른 시야로 극을 뜯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미천한 실력의 나조차도, 프로 무대를 관람할 때면 연기와 연출 그리고 미장센 등을 하나하나 살펴보곤 한다. 작품을 오롯이 즐기는 것이 좋은 관람 자세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가 우리의 시야를 바꾸듯이, 내 연기 경험은 연극을 관람하는 시야를 바꾸었다. 나의 시야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


관객석을 채울 선배 단원들도 나와 비슷한 눈을 갖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들은 나보다 실력도 뛰어난 베테랑이었다. 선배 단원들은 스스로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평가자의 위치에 설 터였다. 누군가 내 연기를 관람하는 것과 평가하는 것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평소 군중 앞에서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도, 예리한 눈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단 한 사람 앞에선 말을 더듬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선 '관객도 연극의 일부다'라는 나의 주문은 정상 작동하기 어렵다. 나에게 그들은 관객이 아닌 심사위원이었다.


더군다나 8월에 있을 신입 공연 -신입 기수로만 진행하는 이벤트성 정기 공연이다. 신입 단원은 이 공연에서 처음으로 외부 관객을 초청한다.- 의 연출을 맡은 선배도 있었다. 그는 펜과 수첩을 손에 든 채, '너희들의 모든 걸 빠짐없이 기록하겠다'라는 얼굴로 무대를 살폈다. 신입 발표회가 2월이었으므로 6개월 전부터 공연 준비에 들어선 선배의 자세에 경외심도 들었지만, 지금은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랜만의 압박감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가 나의 핵심 과제였다.


배우 전원이 한 컷에 들어간 귀한 사진


우선 나는 선배 단원들을 얼굴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들이 관객이 아닌 평가자라면, 차라리 상황을 압도해 주도권을 쥐겠단 마음가짐에서였다. 이런 행동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선배 단원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쫄아서 그런 건 아니다.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동기들의 한숨 소리와 돌림노래처럼 들리는 '긴장된다'라는 말이 내 가슴을 더욱 출렁이게 했다.


공연 순서는 『줄넘기를 찾는 사람들』, 『돌의 이름』, 『흰 티셔츠』 팀 순이었다. 여러 팀이 합동 공연할 때는 첫 번째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 가장 좋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런 건 제일 먼저 해치워버려야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 우리 팀은 두 번째 공연이었지만, 마지막 순서가 아닌 것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어느새 첫 팀의 공연이 끝나고 우리 팀의 차례가 다가왔다. 팀원들은 서로를 독려하며 무대 뒤로 들어갔다. 나는 수차례 심호흡을 하며 함께 등장할 부인 역의 배우에게 주먹 인사를 건넸다.


공연 전 연출이 무대로 나와 극과 팀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런데 연출이 배우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던진 한마디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우리 배우들이 무대를 찢어버릴 겁니다!" 맙소사! 이런 뒷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의 호언장담이라니. 연출의 단언에 내 부담감은 배가 되었다. 찢어지는 건 무대가 아니라 내 마음일 것만 같았다. 이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옆에서 마음 졸이던 부인은 연출의 단언에 큰 한숨과 함께 속삭였다. "아, 미치겠네. 어떡해...."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실제 연출이 원하는 대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어느덧 조명이 내려가고 침묵도 내려앉았다. 이내 음악과 조명이 무대를 장식하고, 출발 신호와도 같던 '예술가'의 첫 대사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모든 배역의 첫 순간이자 마지막 순간이 착실히 흘러갔다. 무대 뒤에서도 그리고 무대 위에서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배우가 혼신을 다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 또한 이에 부응하고자 했다.


어떤 상황이길래 이리도 긴박할까?


나를 구석까지 분해할 것만 같았던 선배 단원이자 관객들은 공연을 있는 그대로 즐겨주었다. 그들의 반응은 평가자가 아닌 순수한 관객, 그것도 매우 충실한 관객이었다. 그들은 연극에서 한 축의 역할을 성실하게 이행했다. 제 몫을 다해 준 관객 덕분에 우리 팀은 그야말로 무대를 '찢어버릴' 수 있었다. 연출의 단언은 과장도 뜬구름 잡는 소리도 아니었다. 『돌의 이름』은 연출의 말대로 좋은 반응을 끌어냈고, 배우들은 남부끄럽지 않은 공연을 펼쳤다. 공연 후 우리 팀은 전국 및 지역 기반 단막극제에 출품을 제안받는다. 신입 단원들의 첫 합동 공연치고는 꽤 훌륭한 성과였다.


시간이 흘러 6월이 된 지금, 나는 『돌의 이름』을 그때 그 사람들과 다시 한번 준비 중이다. 지역 단막극제 '상상역 페스티벌'에서 공연 예정이기 때문이다. 나는『돌의 이름』을 극단 내부에서만 공개한 탓에 아쉬움이 컸다. 이 좋은 극을 외부에 선보일 수 없다는 건 낭비이자 극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무대를 대중에 공개할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은 내부 공연 때보다 더욱 완성도를 끌어 올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각자 고유한 색을 지닌 배우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어우러지는지, 하루빨리 여러분께 보여주고 싶다.


* 단막극제 '상상역 페스티벌'에서 『돌의 이름』을 공연합니다. 독자께서 관람하러 오신다면 크나큰 영광이겠습니다. 예매 및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enitheater.modoo.at/?link=e2c6ac9i


'상상역 페스티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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