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라는 이름의 차별
'장애우'. 한때 장애인을 배려하자는 좋은 취지로 제안되었던 단어다. 장애인을 친구처럼 따뜻하게 부르자는 의미에서였다. 의도 자체는 좋았다. 그러나 탁상공론이 늘 그렇듯, 정작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은 채 캠페인이 진행됐다. 결과는 어땠을까. 많은 장애인들이 이 용어에 불쾌감을 드러냈고, 결국 '장애우'라는 단어는 시간과 예산만 낭비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문제는 배려의 방식에 있었다. '장애우'는 장애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기보다는, 마치 시혜와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장애'인'보다는 '장애'인에 즉, 사람보다는 장애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장애우'의 '우'는 친구를 의미하지만, 이에 많은 장애인들이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들이 왜 제 친구입니까?' 이 용어는 마치 장애인에게는 친구를 선택할 권리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우리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나도 장애인을 배려로 포장한 차별의 시선으로 보고 있지는 않을까?', '나도 장애인을 일방적으로 도와야 할 존재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을까?' 장애우 캠페인이 한창일 당시, 우리 중 대다수는 그것이 좋은 취지라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옳다고 믿은 그 '배려'가 오히려 차별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 대부분 그러한 의도까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어는 사회의 인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지만,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은 아니다.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게이'라는 용어의 탄생 배경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과거에는 동성애자를 '호모'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용어가 경멸적이고 모욕적인 의미로 쓰인 탓에, '즐거운'이라는 뜻을 지닌 '게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게이'는 비하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언어만 바뀌었을 뿐, 인식은 아직도 제자리인 셈이다. 이렇듯 용어 변경이 인식 변화에 늘 성공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지금은 '장애우'가 차별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장애우 캠페인의 실패가 시사하는 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시사점은 명확하다. '배려가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배려 역시 차별을 품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호모'라는 용어의 폐지는 우리 인식에 변화를 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장애우'라는 용어의 폐지는 우리 인식에 변화를 주었을까? 배려로 위장한 장애인 차별이 지금은 사라졌느냐는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는 그 질문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장애우'라는 용어가 사라졌다고 해서, 배려로 위장한 무의식적인 차별이 사라진 건 아니라는 의미다.
대학 시절, 하반신 마비로 10년 넘게 휠체어를 타던 친구가 있었다. 긍정적이고 유쾌했으며 지적이기까지 했던 그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신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어느 날 졸업을 몇 주 앞두고 열린 파티에서 그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너만은 날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줬어."
나는 그 의미를 되물었다. 그는 학창 시절 내내 자신을 특별하게 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나였다고 했다. 자신을 특별히 불쾌해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상냥하게 대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 1'처럼, 나중엔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 1'처럼 자신을 대했단 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무심함'이 그에겐 오히려 진정한 '배려'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장애인으로서 겪는 고충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장애인이 겪는 고충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다층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최근, 난 이와 비슷한 말을 스탠드업 코미디 쇼 영상에서 다시 들었다. 영상 속 관객석엔 지체장애인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코미디언은 다른 관객에게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지체장애인을 소재로 농담을 했다. 한바탕 관중들의 폭소가 지난 후, 그 지체장애인은 힘겹게 코미디언에게 말했다. "장애인도 똑같이 코미디 소재로 이용해 줘서 고마워요." 나는 모든 장애인이 이 말에 동의하리라 일반화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내 친구와 코미디 쇼 일화로 미루어 볼 때, 많은 장애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바로 '나도 당신들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해 주세요'라는 바람을 말이다.
우리가 윤리적이건 비윤리적이건, 우리 대부분은 장애인이 겪는 다층적인 고충을 단순하게 치환한다. 정작 자신의 고충은 너무도 복잡해서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장애인도 당연히 인간이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의 고충도 우리만큼 복잡하고 심층적일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 중 다수는 장애인의 피상적인 불편함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장애인을 '무조건 도와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 사고방식이 그들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칠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마치 '도와주고 있는 대상'보다, '도와주고 있는 나'가 더 중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경멸의 시선과 연민의 시선, 둘 모두의 기저에는 동일한 심리 기제가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두 시선은 공통적으로 '그들'과 '우리'를 분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장애인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든,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든 그 기저에는 '장애인은 부족한 존재'라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경멸'과 '연민'은 흡사 반대말 같지만, 사실 동일한 사고방식의 두 측면일 뿐이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들이 두 가지 시선 모두에서 심리적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분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만약 여러분이 장애인 봉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나를 포함하여 많은 분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멀리서 글이나 끄적이는 나보다, 여러분이 훨씬 더 실천 지향적이고 훌륭한 사람들이다. 다만 내 주장의 요지는, 진정으로 동등한 대우가 무엇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의 다층적인 내면을 무시한 채 겉만 번지르르한 배려는 오히려 차별을 강화할 수 있음을 인지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와 대학 시절을 함께한 '장애우'가 내게 했던 말을 빌려 답변하고자 한다. "우리가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해. 우리는 모두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내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굳이 도울 거리를 찾을 필요는 없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먼저 부탁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