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도 당신도 아닌, 나부터 시작하는 민주주의
* 본 칼럼은 특정 정치 세력을 옹호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 없이, 사회 전반에 퍼진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립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 어디서든 정치 이야기가 한창이다. 뜻이 맞아 들뜬 사람들, 뜻이 달라 다투는 사람들,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사람들까지, 실로 다양한 모습들이 펼쳐진다. 나는 친분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정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정치 담론을 꺼내더라도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내 생각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다. 경험 상 나와 같은 회색분자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정치 이야기를 시작할 때, 상대도 자신과 비슷한 관점을 가졌으리라고 억측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내세운다. 이는 그 기저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야말로 상식이며 옳음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갈등 소지가 큰 화두를 안부 인사인 양 꺼내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상대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상식에서 벗어난 '몰상식한 이단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선거철이면 늘 들리는 말이 있다. '국민 수준은 올라갔는데, 정치인 수준은 그대로다.' 나도 십여 년 전에는 이런 말을 자주 했었다. 당시 한국은 정치적 격변기였고 그 덕에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였다. 그땐 이 말을 당연하다는 듯 되뇌곤 했지만, 지금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이 말을 내뱉던 내가 얼마나 오만하고 편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무책임하고 반소통적이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표어 이면의 함의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다원성과 소통의 정신과 어긋난다는 뜻이다.
해당 표어는 언뜻 보면 정치인을 비난하는 듯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내 정치적 수준은 매우 높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를 따라오질 못하고 있다'라는 전제가 숨어 있다. 즉, 나와 다른 정치 성향을 가진 이들은 전부 '열등하다'라는 인식을 내포한다. '내 의견'과 '다른 의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운 후, 내 의견의 우월성을 내세워 다른 의견을 전부 싸잡아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스스로 자기 수준이 높다는 사람치고 실제 그런 사람은 희박하다.
이런 확증 편향과 불통의 자세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토론과 논의를 사전 차단한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모든 국민에게 있음을 구현하려는 체제다. 그래서 구성원 간 소통이 원활할수록 민주주의는 건강하게 작동한다. 실제로 가장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받는 북유럽의 일부 국가는,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다양한 사회 계층이 참여하는 협의 전통을 갖고 있다. 이들은 다수와 소수의 의견 모두를 조율해 정책에 반영하려 노력하고, 이는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국민 수준을 운운한 표어'는 자기 의견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다른 의견은 들을 가치조차 없는 수준 미달 발언으로 간주한다. 소통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다수결주의'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결정되기까지 충분한 논의와 타협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국민 다수 지지'라는 이유로 소수 의견이 묵살된다면, 그것은 결코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다. 그리고 극단적 다수결주의가 한때 독일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견해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넌제로섬 체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 진영의 세를 불리고 상대를 척결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도 있다. '노인 세대가 빨리 죽어야 세상이 바뀐다.' 이렇게 특정 세대 전체를 시대 변화의 방해물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은 그 어떤 형태로든 혐오와 배제로 이어진다. 그것은 결국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라는 위험한 정서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대 세력을 배척하는 체제가 독재나 전체주의, 그리고 파시즘과 같은 반민주적 체제임에도 말이다.
이처럼 편향된 표현은 내가 속한 30~50대 사이에서 무비판적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동조 편향으로 인해 그 문제점을 성찰하지 못한 채, 배척과 불통이 마치 정의로운 태도인 양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 이런 말을 할 때, 그 말의 위험성을 비판할 의도로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 수준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 내 말에 동의하면서도 자신만은 그 비판의 대상에서 예외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비판의 대상이 자신이란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내가 자신과 같은 집단을 비판한다고 착각한다. 실로 확증 편향과 선택 편향이 만들어낸 환상의 콜라보가 아닐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의 3050 중 대다수는 진보 진영을 지지한다. 반면 그 윗세대는 보수 진영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국민 수준 운운'이나 '노인 세대 배척'과 같은 말은 대체로 진보 성향 지지자들 입에서 나온다(다시 말하지만 이는 현상에 대한 분석일 뿐, 특정 세력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밝힌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선택이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견해가 갈등을 봉합하고, 소수자 인권을 보호하며, 미래 세대에 득이 되는 길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이런 '배척'의 언어와 '통합'의 언어가 같은 입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뿐, '민주주의'를 하고 있지 않다.
난 이런 모순을 마주할 때마다 다시 다음 결론에 다다른다.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 수준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 현재 한국은 어느 진영이 정권을 잡든 그 진영 지지자의 수준에 걸맞은 정부가 들어선다. 그리고 양 진영 모두 그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서로 다르다고 애써 우기지만, 그저 간판만 다른 위생 불량 식당에 불과하다. 현 정치권은 진영이 어디든 모순적이고, 극단적이며, 반소통적인, 한 마디로 반민주적인 통치 형태로 굴러간다. 그리고 이 상황을 초래한 책임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쟤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다. 바로 나다. 내가 경험한 모든 정권은 정확히 내 수준에 걸맞은 정권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극단적인 세대 갈등을 겪고 있다. 게다가 이 간극은 좁혀질 기미는커녕,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있다. 모두가 이 문제를 통감하면서도 여전히 책임은 상대방에게만 돌리고 있다. 바로 그 책임 전가가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큰 장애였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방식이 민주주의를 퇴보시켜 왔다면,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책임 전가가 아니라, 자아 성찰에 기반한 자기반성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나는 우리가 자기 수준에 대한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자기 과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과실을 인정하면 상대가 고자세로 나올 것 같은가? 사람 심리는 어딜 가나 비슷해서 과실을 먼저 인정하면 상대도 과실을 인정하기 마련이다. 설사 상대가 고자세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 지금 이대로라면 민주주의의 퇴보는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의 해결 방안을 논의하고, 그 논의의 과정에서 차이를 좁혀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민주주의의 수준을 결정짓는 사람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