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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Nov 28. 2022

5화_개들에게 선물로 받은 게 이렇게나 많습니다.

개들 역시 사람만큼이나 성격이 다르다. 품종에 따라 경향성은 보이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동양인은 수학을 잘해, 흑인은 운동을 잘하지, 같은 일반화는 오류가 많다. 개 역시 그렇다. 개들 성격은 말 그대로 '개 바이(by) 개'다. '종특'은 그저 참고 사항일 뿐이다. 성격도 하는 짓도 생긴 것만큼이나 제 각각이다.

복주(사진 왼쪽)는 내향적인 친구다. 낯을 가리고 친구를 많이 사귀지 않는다. 가족 중심적 관계를 선호한다. 모르는 사람이 말 거는 걸 싫어한다. 상대가 아무리 다정하게 눈 맞추며 손을 내밀어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른 데로 가 버린다. 경계한다. 반면에 복주는 가족에게 관대하다. 조카는 복주를 종일 만지고 끌어안고 쓰다듬는데도 싫다는 내색 한 번을 않는다. 백 번을 불러도 백 번 다 간다. 또 책임감이 강해 해탈이도 잘 챙겨 다닌다. 어쩌다 집에서 한 번씩 내가 해탈이를 혼내면 복주가 나서서 말린다. 내 손에 자기 머리를 들이밀며 만져 달라고 애교를 피우며 중재를 요청한다. 영리하고 헌신적이며 인내심이 강한 편이다.


해탈이(사진 오른쪽)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다. 사람은 사람대로 개는 개대로 전부 좋아한다. 산책하다 말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기어이 인사하고 가야 한다. 심지어 바짓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밀어 넣기도 한다. 특히 잘 생기고 예쁜 사람에게 관심받는 걸 즐긴다. 덕분에 이 친구는 우리 동네에서 유명하다. 산책하다 보면. 해탈 이를 보고 달려오는 어린이 친구도 많다. 지난겨울엔 해탈이 그림이 그려진 편지도 선물도 받았다. 생긴 것도 특이한 데다 하는 짓도 유별나고 이름까지 독특하니 사람들이 잘 알아본다. 하지만 집에서의 이 친구 모습은 밖과 다르다. 용건 없이 부르면 절대로 오지 않고, 잘 때 만지면 성질낸다. 빗질을 싫어한다. 엄살이 심하고 성격이 급하다. 절대로 맘 편히 만질 수 없다. 절대로.


아마 해탈이는 지금보다 더 맛있는 사료와 산책 기회가 약속된다면 굳이 내가 키우지 않아도 가서 잘 살 거다. 하지만 복주는 다르다. 복주는 가족(나, 작은오빠, 조카 2호, 해탈이) 없이 살 수 없다. 누군가 복주에게 더 좋은 좋은 주거 공간과 사료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프리즌 브레이크>(감옥을 탈출하는 드라마)를 찍을 친구다.


둘만 해도 성격이 이토록 다르다. 사실 개들 입장에서 어느 편이 삶의 만족도가 더 높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루 중 꼬리 흔드는 횟수를 기준으로 보면 확실히 복주보다는 해탈이 쪽이 행복한 감정을 자주 느끼는 것 같다. 알기 쉽게 이들의 행동을 낚시로 비유해 본다. 복주는 세상을 향해 드리우는 낚싯대가 몇 개 안 돼 자주 기쁘지 않지만 해탈이는 직접 물가로 나가 그물을 던지고 살아 수시로 기쁘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내 생각이다. 두 녀석 모두 내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므로(한다고 해도 못 알아듣겠지만).

그보다도 놀라운 점은 이들의 철저한 개별성이었다. 그간 관찰한 이들의 개별성에는 일반적인 개의 성격이라고 여겨지는 예컨대 진도와 허스키의 특징 같은 것들과 다른 지점이 많았다. 그중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우리 집에서 사냥을 하는 건 시베리안 허스키인 해탈이다. 새 잡는 진도가 아니다. 복주는 새를 쫓다 그 새가 날지 못하면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지만 해탈인 다르다. 사냥한다.


그러니 일반화는 얼마나 폭력적인 관찰자의 시선인가.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는 이래, 남자는 이렇지, 하는 식의 구분은 구시대적인 사고다. 우리는 모두 철저하게 독립적이며 개별적이니까. 남을 분류하는 건 편하지만 내가 남의 잣대로 분류당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개를 볼 때 너무 품종 품종 안 했으면 좋겠다.


이 글을 보는 분들 중 혹여라도 반려견 입양을 고려하신다면 외모보다 품종보다 중요한 건 개의 건강 상태와 성격이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개는 나와 함께 최소 십 년을 살아야 하는 가족이다. 그러니 보이는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마시길. 이런 연유로 나는 그래서 번식장에서 교배시켜 나오는 개들 사지 말라고 한다. 개도 생명이라 자연 상태에서 스트레스 없이 태어난 개들이 건강하고 성격도 좋다. 물론 우리 개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종종 주변 사람들이 우리 개들이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인다며 평소에 훈련을 어떻게 시키냐고 묻는데, 그때마다 그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라고 한다. 언제 한 번은 누가 충고랍시고 진돗개는 방에 가두고 죽지 않을 정도로 한 번 패야 한다는 소리를 한 적 있다. 그래야 말을 잘 듣는다고. 글쎄 나는 그렇게까지 해서 내 말을 잘 듣는 개를 원하지 않는다. 말 좀 안 들으면 어떤가. 서로 행복했으면 됐지. 개와 함께 있는 것 자체로도 좋으면 된 것 아닌가.


현자들이 말하길, 인생을 바꾸기 힘들거든 성격을 바꾸고 성격을 바꾸는 게 힘들거든 환경을 바꾸라고 한다. 맞다. 나 역시 개와 살면서 환경에 변화를 주니 생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일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가서 걷다 보니 피곤해서 저녁에 먹는 정신과 약이 많이 줄어들었다. 또 개들하고 같이 산으로 들로 싸돌아다니다 보니 계절을 전보다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예컨대 꽃이 피고 잎이 지는 순서, 해와 바람과 비가 하는 일들. 예전엔 잘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노상 시멘트 블록 안에서 자고 일어나 아스팔트를 걸어 콘크리트로 된 건물에 들어가 공부하거나 일하며 살았다. 계절과 풍경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적 감각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개를 통해 확실히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요즘은 비가 오면 다음날 숲의 냄새가 바뀐다는 것도 안다. 요즘 내 상태는 내가 개인지 개가 나인지 헷갈릴 정도다.


요즘 개를 돌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게 한 친구는 "개는 어디까지나 개"라고 한다. 물론 동의한다. 사람은 사람이고 개는 개다.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우리 집 개와 다른 집 아이가 동시에 물에 빠지면 난 다른 집 아이를 먼저 구할 거다. 인간이 개보다 우월하다 여겨서 하는 게 아니다. 내가 개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태어났기에 하는 행동일 뿐이다.


무엇보다 공동체에 존재하는 책임과 의무를 따라 할 것이다. 어른이란 내 개를 잃어버리는 슬픔과 타인이 아이를 잃어버리는 아픔을 양팔 저울에 달아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다. 내 개도 이만큼 예쁜데 자기 속으로 낳아 기르는 자식은 얼마나 예쁠까를 생각해야 하니 말이다. 덕분에 요즘 나는 지붕 한쪽을 내어준 대가로 이 친구들에게 되려 참 많은 것을 선물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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