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은 의식이 되고 의식은 태도가 된다.
개 역시 사람만큼 성격이 제 각각이다. 통상적으로 품종에 따라 일반적 특징은 관찰되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인종마다 특유의 경향성은 있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러니 진도는 이렇다. 허스키는 저렇다. 하는 얘기를 맹신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품종은 그저 품종일 뿐이다. 개는 각기 다른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개 역시 사람처럼 같이 살아 보기 전까지 모르는 거다.
평소에 나는 우리 개들을 이야기할 때 의도적으로 분명하게 “개”라고 부르려 노력한다. 가령 이런 거다. “ 저 먼저 가 볼게요. 집에 개가 있어서요” “ 개 밥 주러 가야 해요”라고 하자. 다른 반려인들처럼 “ 우리 애 기다려요” 혹은 “ 우리 복주 밥 줘야 해요”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에 대해 개를 안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미묘한 호칭의 차이를 잘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이 안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개를 개라고 부르는 전자인 나는 개를 개로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후자의 경우처럼 개를 인간 가족을 부르는 용어로 부르는 사람들, 가령 자기 개를 “우리 아이‘ 혹은 ’ 딸‘ 이나 ’ 동생‘ 이라던가 “누구누구” 사람처럼 부르는 사람들은 실제 개를 사람 대하듯 대한다.
그리고 개든 사람이든 언어는 의식이 되고 의식은 행동이 되기 때문에 상호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호칭은 신중하게 선택하고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 중에 드러나는행동과 태도의 결과가 무척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누가 맞고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선택의 문제다. 나는 애초에 내가 개를 개로서 대하지 않고 인간처럼 대하면 분명 개나 나나 서로 힘들 것 같아 반려 초반부터 의식적으로 개들을 ‘개’라고 부르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아무래도 중간이 없는 내 성격상 우리 개들을 내가 딸로 관계정의 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정말 복잡해질 것 같아서 그랬다.
진돗개 복주(사진 왼쪽)는 내향적이다. 낯을 가리고 친구를 많이 사귀지 않는다. 조용히 움직인다. 가족 중심적 관계를 선호하고 낯을 가린다. 경계심이 강하고 매사 의심한다. 어린 개와 성인 남자를 싫어하며 가족에게 관대하다. 유독 조카 녀석을 좋아한다. 조카가 종일 복주를 만지고 또 만져도 복주는 여태 싫다 소리 한 번을 안 했다.
조카네 다녀오면 손때가 반질반질 타 올 정도다. 녀석은 순종적인 성격이고 책임감이 강하다. 동생인 해탈이도 잘 돌본다. 어쩌다 내가 해탈이를 혼내면 녀석이 찾아와 중재한다. 내 손에 지 머리를 들이밀며 화내지 말라고 다정하게 요구한다. 영민하며 인내심이 강한 친구다. 인간과 교감을 잘한다. 움직이는 모든 것에 반응한다. 호기심이 많다. 사냥을 좋아한다.
시베리안 허스키인 해탈이(사진 오른쪽)는 외향적이며 사교적이다. 행동이 크고 요란하며 시끄럽다. 사람도 개도 전부 좋아한다. 산책 중에 다른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기어이 찾아가 인사하고야 만다. 특히 젊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한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 덕분에 동네에서 유명하다. 이 동네에 친구가 나 보다 많다. 지난 크리스마스엔 카드와 선물도 잔뜩 받았다..
생긴 것도 특이한 데 이름까지 독특하니 사람들이 많이 알아본다. 하지만 집에서 모습은 전혀 다르다. 어둡고 찬데 혼자 있고 싶어 하고 쉬고 있을 때 만지면 으르렁댄다. 배가 고프거나 산책 가고 싶다고나 하는 용건이 있을 때만 찾아온다. 목욕을 싫어하며 성격이 급하다. 고집이 세다.
아마 해탈이는 지금보다 더 맛있는 사료와 산책 기회가 약속된다면 아무나 따라가 잘 살 것 같다. 하지만 복주는 다르다. 복주는 가족주의자다 누군가 복주에게 더 좋은 좋은 주거 공간과 사료를 약속한다 할지라도 언제 어디서든 <프리즌 브레이크>(감옥을 탈출하는 드라마)를 찍고 우리 집에 다시 찾아 올 친구다. 종종 심지가 곧은 녀석을 보면 이런 애들이 독립운동하겠구나 싶다.
이렇듯 우리 개들만 봐도 대중에 알려진 이들의 품종 특징과 다르다.해탈이가 도둑을 봐도 배를 깐다는 허스키답게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것 빼고는 세간에 알려진 개들의 종특이 뚜렷하게 관찰되지 않는다. 식성도 성향도 전부 다르다. 또 집 지키는 개라고 알려진 복주는 집을 지키지 않는다. 택배가 오고 초인종이 눌려도 신경 안 쓴다.
복주는 건강체질이지만 해탈이는 잔병치례가 많다. 해탈이가 아플 때마다 시베리아에 사는 겨울 개가 여름이면 40도에 육박하는 한반도에 살아 아픈가 싶어 이런 개를 누가 여기까지 데려왔나 싶어 속 상하다. 특히 지난여름은 어찌나 더웠나. 말도 못 하게 고생했다. 그래서였을까 여름 끝물엔 면역력이 떨어져 방광염도 꽤 오래 앓았다. 에어컨 앞에서 종일 살아도 삼중모 코트를 입은 털짐승은 반도의 삼복더위가 힘든 모양이다.
한데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그렇게나 우리 개들을 보면 한 마디씩 한다. 진돗개인 복주를 보면 사납죠? 얘 물어요?로 시작하는 게 부지기 수고 해탈이를 보면 털 많이 빠지죠?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틀렸다. 털은 복주가 더 많이 빠지고 사납기로 따지면 해탈이가 더 사납다. 복주는 쫄보다. 털갈이 시즌을 제외하고 해탈이는 털이 많이 빠지지 않는다. 참고로 개들은 더운데 살면 털이 많이 빠진다.
개들과 함께 살며 나는 잠자는 방 한 칸을 제외하고 단 한 군데도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내 방의 온도조차 한 겨울에도 17도를 넘겨 본 적 없다. 사람이야 추우면 껴 입으면 그만이지만 개는 더우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산다. 이렇게 하니 개 털이 안 빠진다. 서로 좋다.
전에 한 번 복주랑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내게 충고랍시고 진돗개는 반드시 한 번은 방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 패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말을 듣는다고. 글쎄 나는 그렇게까지 해서 내 말을 잘 듣는 개를 원하지 않는다. 개가 내 말 좀 안 들으면 어떤가. 함께 나랏일을 할 것도 아닌데. 그러니 그런 섣부른 말들은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와 나는 개들을 키우며 이 친구들에게 선물을 참 많이 받았다. 그건 바로 밖에 나가 걷지 않으면 절대 모르고 살았을 것들이다. 가령 나는 개들 덕분에 이제 날씨에 민감한 사람이 됐다. 또 개와 함께 산과 들을 누비며 비와 바람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았다. 꽃이 만개하면 비가 왔고 단풍이 절정이면 바람이 불었다. 신기했다.
전에 나는 한평생 콘크리트로 된 건물에 들어가 먹고 자고 일하며 비는 왜 내려서 바닥을 질척이게 하는지 도대체 바람은 왜 불어서 스커트 자락을 자꾸 쓸어내리게 만드는지 불평만 하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비도 바람도 눈도 다들 각자 하는 일이 있었다. 괜한 일은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요즘 현대인들은 서로서로 벽을 치고 홀로 산다.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도 한정적이다. 또 세상은 점점 각박하게 변하고 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세상을 산다. 그러니 서로 질세라 “내 새끼 지상주의”에 혈안이 돼 있다. 한데 재밌는데 이런 현상이 개를 키우는 반려인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된다는 거다. 일부 반려인들이 개를 숫제 자식처럼 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인간이 품고 낳은 아이와 어떻게 개가 같을까. 그렇게 돼서는 안 되겠다.
그러니 의도적으로라도 나는 개를 개라고 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아무리 개를 자식처럼 키운다 한들 그 개가 커서 어버이날 내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아 줄 건 아니지 않은가. 내 개가 귀한 것도 맞지만 내 개가 귀하면 남의 아이는 얼마나 예쁠까 헤아려 보는 것도 요즘 반려인에겐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연유에서 오늘은 누군가 전에 내게 했던 질문에 답을 하려 한다. 언젠가 누가 내게 페이스 북으로 ”우리 개와 다른 집 아이가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것이냐 “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대답은 변함없다. 난 남의 집 아이를 먼저 구할 거다 나는 내 개가 아니라 어린애 대신 내가 빠져 죽는대도 아이를 구할 거다.
더는 새끼를 잃고 늑대처럼 우는 검은 어미의 얼굴을 더는 들여다볼 자신이 없기도 하거니와 어려서 나는 어른들로부터 머리 검은 짐승이 머리 검은 사람에게 그러면 벌 받는다고 오래도록 배우고 자란 덕분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