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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Dec 24. 2022

7화_개가 비둘기 사체를 물고 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혹한과 혹서보다 더 두려운 것은

운동을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걷기'만큼은 싫어했다. 걷느니 차라리 뛰고 말지 싶었달까. 그래서 여태 스포츠센터에 갈 때도 최대한 차로 목적지까지 가까이 차를 가지고 가서 운동을 마치면 다시 차로 최대한 집 앞까지 오곤 했다. 내게 “걷는다”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을 때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놈의 개랑 살고 나서는 도무지 걷지 않으래야 걷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우리 개들은 전부 지독한 실외배변견이다. 그러니까 두 놈 다 머리 위에 지붕이 있으면 죽어도 안 싼다. 해서 녀석들 중 누구 하나 탈이 나면 나까지 꼬박 밤을 새웠다.


개와 살기 시작하자 하루에 만 보는 우습게 걸었다. 작정하고 운동을 해도 잘 채워지지 않던 스마트워치의 운동링은 어찌나 잘 채워지던지, 전에는 못 보던 기록 경신 메달을 개들을 키우며 수없이 보게 됐다. 이렇게 거의 3년을 꼬박 걸었는데 과연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걷는 것을 좋아하게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여전히 걷는 게 썩 내키지 않다.

사람이 개와 함께 걷는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산책이라기보다 노동에 가깝다. 왜냐면 걸을 때도 항상 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딴생각에 빠져 개줄을 느슨히 잡았다가는 고양이나 새를 보고 반응하는 개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개보다 항상 시야를 먼저 확보하며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난감한 일을 겪게 된다. 그간 개들과 산책하며 실제로 힘든 일을 제법 겪었는데 그중에 최고는 지난여름에 겪은 비둘기 사건이었다.


더위를 심하게 타는 시베리아 개 해탈이 때문에 여름이 되면 우리는 산책을 꼭두새벽에 한다. 그래야 그나마 서로 쾌적하게 산책할 수 있다. 그 시간을 넘기면 더위도 더위지만 등굣길 학생들과 출근길 직장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가급적 사람이 붐비는 시간은 피한다.


하지만 이런 새벽 산책의 단점이 하나 있는데 너무 이른 시간에 나가면 도로 청소가 안 돼있을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길에 개들이 좋아할 만한 쓰레기들이 도로에 넘친다. 평소에도 원체 식탐이 없는 복 주는 괜찮은데 해탈이는 달랐다. 녀석의 민감한 코엔 늘 별개 다 걸려들었다.


덕분에 나는 공원 어귀에 사람들이 밤 사이 다양한 걸 내다 버린다는 걸 알게 됐다.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봉지는 예사고, 돼지나 생선의 뼈나 닭다리 같은 것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정도도 귀엽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해탈이 가 물어든 내 팔뚝만 한 사이즈의 비둘기 사체에 비하면.

그날도 새벽에 산책을 하는데 어느 순간 보니 해탈이 가 죽은 비둘기 사체를 물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걸 보고 놀란 나는 해탈이의 목 뒷덜미를 잡고 흔들며 비둘기를 뱉으라고 야단쳤다. 하지만 녀석은 꿈쩍도 안 했다. 이해한다. 평소에도 해탈이는 비둘기만 보면 잡겠다고 야단을 쳤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비둘기를 드디어 물었으니 쉽게 포기가 안 되겠지. 그렇다면 나는? 나 또한  물러설 수없었다. 녀석이 죽은 비둘기를 행여 먹기라도 하면? 죽은 새를 잡아먹고 병이라도 나면? 아니 그보다 먼저 지금 입에 물고 있는 저 비둘기를 집까지 가지고 간다면?


어쩔 수 없이 최후의 방법을 써야 했다. 그건 녀석의 뒷다리를 양손으로 잡아 들고 흔드는 것이었다. 거꾸로 매달린 녀석도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바로 비둘기를 뱉고는 아프다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이 잊으면 안 되는 게 있다. 해탈이의 몸무게는 20킬로다 (허스키치고 작은 편에 속한다). 40대 중반의 여성이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는 20킬로짜리 개를 흔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얘기다. 온 동네의 시선이 나와 해탈에게 집중 됐지만 그 순간 나는 “수치나 체면”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물론 우리 해탈이 가 유별나긴 하다. 복주는 절대 하지 않는 일을 얘는 한다. 호기심도 어찌나 많고 활동량도 많은지 한 시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 않는다. 덕분에 나 역시 이 친구와 야외 생활을 지난 삼 년 간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이 녀석이 죽은 비둘기 사체를 물고 신나게 흔들어댈 줄은 몰랐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나는 뜻밖의 사실을 하나  깨달았는데, 그건 바로 청소 노동자의 업무에 고양이나 비둘기 사체를 치우는 일까지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왜냐 나는 이날 이후로 나는 새벽 산책길에 심심치 않게 새나 고양이의 사체를 봤기 때문이다. 또 매일 같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양의 쓰레기가 마구 버려지는지 알았다. 희한하지. 사람들은 밤이 되면 낮보다 쓰레기를 많이 버린다.

이 날 이후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나는 예방 차원에서 입마개를 하나 구입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탈이 녀석이 입마개를 지독하게 거부했다. 이건 전혀 예상 못했다. 녀석은 입마개만 봐도 기겁을 했다. 발버둥 치는 개를 잡아 간신히 입마개를 한다고 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녀석은 입마개를 뺄 때까지 절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먹을 걸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라 훈련도 안 먹혔다. 직접 개를 키우기 전까지 개들이 생각보다 의사 표현을 확실하게 한다는 걸 몰랐다.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내가 입마개를 고집한다면 모르겠는데 나 역시 그 정도로 마음이 독하지 못하다. 입마개를 하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리며 입마개를 빼는 해탈이를 보면 하는 수 없이 결국 내가 입마개를 풀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개를 보면 어느 순간 나도 혼자 합의를 하게 된다. 새나 고양이 사체가 가급적 덜 발견되는 곳으로만 산책을 다니면 되지 하는 합의 말이다.

입마개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어째서 유독 한국에서는 개들한테 특히 큰 개한테 입마개를 하라고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여태 큰 개를 키우면서 입마개를 왜 안 하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다들 마치 내가 현대 반려인이라면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을 안 하고 있는 것처럼 군다.


개인적으로 나는 반려견 입마개 논란이 싫다. 지극히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문명화시켰다고 해서 우리만 이곳을 사용해야 한다는 건 억지 논리다. 우리는 이 땅을 다양한 동식물과 함께 써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불편한 건 서로 감수해야 한다. 막말로 인간 때문에 털 짐승들이 얼마나 박해를 받는데 고작 산책하는 개 한 테까지 시비 걸어 좋을 게 뭔가.


게다가 여태 적지 않은 나라게 다녀 봤는데 입마개 하고 다니는 개는 외국에서 거의 못 봤다. 아니 한 마리도 못 봤다. 외국 친구한테 물어보니 입마개를 사용하는 경우는 사회적으로 하나의 위험 표식이라고 했다. 입마개로 "이 개는 위험하다"거나 "사람을 문다"거나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같은 정보를 주는 용도로 쓴다고. 물론 다른 나라는 사회는 사람을 공격하는 개에 대한 처벌이 강력하다. 애초에 입마개를 해야 할 만큼 남에게 위험한 개는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관련 제도 보완이 시급해 보인다. 통계청 추산 개 고양이를 기르는 반려 가정이 천만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으니.


무튼 이런저런 사건 사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개들하고 함께 걷는다. 때로는 덥고 습하고 춥고 괴로워도 나와 함께 걷는 개들이 행복해하는 걸 보는 게 좋기 때문이다. 희한하지? 개를 키우고 난 후 어느새 나는 개가 좋으면 좋고 개가 싫으면 싫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서로 먹는 것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른데 어느덧 여러 층위의 감정을 교류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어쩌면 전에 그토록 싫어했던 걷기를 요즘도 매일 같이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마음을 어찌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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