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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Feb 20. 2023

9화_사랑이란 이름의 폭력

방치견 학대견 이야기

코로나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준 가장 큰 사실은 사람은 사람을 만나고 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다. 집합 금지나 거리 두기로 이른바 “언택트” 시기를 겪으며 크고 작게 다들 우울감을 맛보았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전에는 외딴섬에서도 인터넷만 된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거라 믿었는데 코로나 시절 자가격리를 두어 차례 겪고 나서 깨달았다. 그간 잘 몰라서 까불었구나. 인간이 인간을 벌줄 때 감옥에 가두고 독방에 넣는 게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데 그걸 몰랐다. 어찌 보면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고독일지 모른다.


이는 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처럼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인 개들도 홀로 남겨지는 걸 두려워한다. 무리와 떨어지는 건 생존에 즉각적인 위험이라 본능적으로 그런 듯하다. 그러니 개들이 자신의 무리인 가족과 떨어지는 걸 불안해하는 것이다. 이들 역시 먹고사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게 “관계 맺음”이다. 개를 키우며 이를 간과해선 안 된다.  

건강문제 때문에 한 이 년간 포천의 한 애견펜션에 방을 한 칸 빌려 개들과 함께 지냈다. 사실 처음 포천에 갔을 땐 내가 이 년이라는 시간을 보낼 줄 몰랐다. 건강이 회복하면 돌아가려 했는데 산새 좋고 공기 좋은데 들어앉아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 꼬박 이년이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 밖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서울 토박이인 내가 처음 서울을 떠나게 된 건 서른 살 무렵 다니던 회사에서 지방 근무 발령을 받으면서였다. 지방이래 봤자. 서울서 얼마 안 되는 용인 마북이었지만 그것도 서울서 멀다고 울면서 짐을 쌌다. 서울과 직선거리로 25킬로 떨어져 있는 곳인데 그도 싫다고 어찌나 난리를 피우며 갔나 모른다.


당시 그 동네는 내 기준에 밤에 논 밭에서 개구리가 우는 촌 동네여 더했다. 해마다 내년엔 반드시 서울로 돌아간다고 다짐했으나 사람일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그곳에서 나는 장장 십 오 년의 세월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게 됐다. 막상 가서 살아 보니 의외로 탈 서울이 주는 기쁨이 있었다. 일단 엎어지면 코 앞에 회사가 있으니 출퇴근 길 대중교통 안에서 시달릴 일 없어 좋고 저녁에 술 마시자 불러대는 사람 없으니 집에 가 조용히 좋아하는 책을 골라 읽을 수 있어 또 좋았다.


달리 말해 오롯이 내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서울 보다 더 많아졌달까. 또 공기 좋은 데서 먹고 자고 일 하니 환절기면 스테로이드 연고를 쳐 바르고 콧물을 줄줄 흘리던 비염과 알러지성 피부염도 깨끗이 나았다. 그러다 보니 되려 이제 서울이 사람 살 데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 서울에 일을 보러 나가 그 시커먼 공해 속에 문을 열고 환기하고 있는 집들을 보면 이 새까만 비산먼지들 다 어쩌려고 저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있지? 하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몇 년 전 다시 회사 발령으로 서울로 오게 됐는데 세상에 그 후 서울살이는 이전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수도권 과밀화 현상으로 인구 밀도가 압도적이라 어딜 가나 사람 때문에 숨이 다 막혔다. 그뿐인가 회사 생활도 힘들었다. 시골서는 서로 다 각자의 사정을 헤아리며 일했는데 서울로 오고 보니 다들 서로 밟고 올라가려 안달이었다. 이해는 한다. 회사라는 게 본래 피라미드 구조라 위로 올라갈수록 책상이 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도저히 극복이 안 됐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팬데믹 전에 가까스로 프리랜서로 전향했지만 그 후로도 쭉 서울에 살아야 했다.


클라이언트들은 언제나 내게 어디 사는지 전화로 먼저 물었고 그때 내가 서울이라 답하면 반색해서 날을 잡고 만나자고 하며  일을 줬다. 하지만 내가 경기도라고만 해도 상대는 일을 맡기기 주저했다. 아마 멀리 사는 사람 불러다 가볍게 만나자 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후 줄곧 서울에 살았다. 내 얘기를 전해 들은 친구들은 그냥 말만 서울에 있다고 하고 너 살고 싶은 데 가서 살라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 애초에 나한테 그런 주변머리가 있었으면 애초에 다니던 회사 조용히 더 다녔겠지.


한데 말이다. 개를 집에 들이고는 도저히 서울에서 살 수 없었다. 일단 서울에서 내가 구할 수 있는 집의 크기는 제한적이다. 물론 우리 개들은 집에서는 잠만 잔다. 그렇다고 해도 사지를 쭉 뻗으면 백육십은 족히 되는 대형견 두 마리와 서울의 코딱지만 한 집에서 지내는 건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해서 포천의 한 애견 펜션에 달방을 얻어 나왔는데 그리 좋을 수 없는 거라. 서울과 포천은 역시 지리적으로 얼마 차이 안 난다. 그런데 희한하지 시도 경계를 넘어서면 마치 어떤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처럼 모든 게 다르다. 공기부터 인심까지 전부 달랐다. 그 후 난 포천 살이에 푹 빠져지 냈다.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시골 살이에도 문제는 있으니 그건 바로 “개” 다.  왜 여기서도 개가 문제냐면, 이곳에선 눈만 돌리면 방치견 학대견이 수 없이 보인다는 거다. 설상가상 포천 집 아래위로 있는 시골집엔 외지 사람들이 개를 사다 닭장 같은데 넣어두고 한 달에 한두 번 와서 사료를 잔뜩 부어 놓고 바가지에 물 한 그릇 떠 놓고 간다. 그럼 얼마 안 가 물엔 벌레들이 알을 까고 사료엔 곰팡이가 낀다. 그걸 먹는 개들의 눈과 귀엔 자주 고름이 차고 여름이면 노란 고름 주위로 파리떼가 드글드글 꼬인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본래 개는 늑대과라 무리 지어 사는 게 익숙한 동물이다. 개는 절대 혼자 살지 않는다. 인간과 무리를 짓든 개와 무리를 짓든 개는 어쨌거나 다른 동물과 무리 지어 사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그런 개를 마당 한 귀퉁이에 묶어 두고 어쩌다 한 번 나타나 사료를 고봉으로 쌓은 대야를 빗자루로 쓱 밀어주고 가는 건 정말이지 개한테 말 못 할 고통이다. 또 건강한 개는 자기 집 주변에 절대 배변 하지 않는다. 다들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데서 볼 일을 본다. 이건 개의 본능이다. 한데 그런 개를 그 짧은 목줄에 묶어 오도 가도 못하게 하니 개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는가. 그러니 포천을 오가며 골목을 돌아서면 천지 사방에서 만나는 이런 밭지킴이 개들을 볼 때면 마음이 무거워 뭘 어쩌지를 못하겠다.

게다가 야산의 공동묘지에는 그렇게 외지 사람들이 차를 몰고 와 키우던 개를 버리고 간다. 대부분 푸들이나 몰티즈처럼 한눈에 봐도 집에서 기르던 개다. 버려진 개들은 풀 숲에 숨었다가 차 소리가 나면 어디선가 달려와 확인한다. 아마도 여기 버려질 때 주인과 함께 차를 타고 와서 그럴 것이다.


이런 개들을 보고 온 날이면 가만히 있어도 돌아 앉아도 개들 걱정에 괴로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딱하고 가엾은 처지의 짐승들을 전부 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있나. 질끈 눈을 감는 수밖에.


처음엔 나도 시도 보호소에 연락하면 데려가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거나 아니면 나라가 동물을 잘 키워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좀 거칠게 말하면 대한민국의 모든 시도 보호소는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버려지는 유기동물을 죽이기 바쁘다. 해서 나는 이들이 행하는 도살 행위를 “안락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안락사의 사전적 의미는 “사고나 질병 등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불치의 생명에게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행위”다.


하지만 현재 국가가 운영하는 시 도 보호소의 안락사는 여건도 취지도 전혀 안락하지 않다. 이들이 하는 건 명백한 도살이다. 어쩌면 대량 살상, 살처분이 될 수 있겠다. 아마 지금도 전국의 시도 보호소에선 외마디 비명도 없이 공고기한이 끝난 개와 고양이가 죽어 나갈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전국의 유기동물이 백만이 넘는다는데 그만큼 사람들이 매일 새로 반려동물을 버린다는 얘긴데 정말 우리에게 해결책이 고작 ‘죽음’ 뿐일까, 이는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이 얘기를 테이블 위로 끌어올려 제대로 한 번 다뤄야 하는 문제 아닐까 싶다.

한데 말이다. 개를 버리는 사람이나 개를 학대하는 사람 모두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개를 싫어하는 사람은 애초에 개를 사지도 않고 헤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사랑을 과연 우리가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아니라고 본다. 사랑에는 명백히 책임과 헌신이 동반돼야 한다. 나 좋으려고 하는 사랑은  그게 뭐가 됐든 사랑이 아니다. 지독한 자기 위안일 뿐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아. 제발 이럴 거면 애초에 개를 사지 말자. 그리고 이왕 샀거들랑 끝까지 기르자. 하긴 사람 목숨도 우습게 아는 나라에서 동물권 얘기를 하자니 나부터 영 목소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정부의 체면과 기업의 이윤이 사람 목숨값 보다 비싼 나라. 여전히 산재 사고 사망률이 OECD 최고인 나라. 고속 성장의 뒤안길에서 다들 쉬쉬하는 사이 밀가루 반죽처럼 노동자들이 끼어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는 나라에서 외려 개처럼 죽는 건 양반인 이 나라에서 제발 개 목숨 좀 함부로 하지 말자고 소리치려니 말이야.


그러고 보면 사람보다 사나운 짐승을 나는 여태 못 본 것 같다. 또 이토록 잔인하고 비정한 동물이 어쩌다 지구 생태계의 패권을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언제 꼭 하느님을 뵙게 되면 진지하게 한 번 따져 물어야겠다.  불벼락은 뒀다 뭐 한다고 아끼냐고. 아꼈다 쌈 싸 먹을 거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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