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주가 옷을 입고 다니는 사연
우리나라는 비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 그런지 유난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 그래서일까. 미국의 한 투자 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전 세계에서 명품 소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해된다. 시내에 나가면 심심치 않게 고가의 명품을 볼 수 있다.
나도 처음 사회생활을 할 땐 유행 따라 명품을 샀다. 그땐 한참 꾸밀 때라 그랬나 구두 밑창이 아기 살결처럼 고와 카펫만 걸어야 한다는 염소가죽 신발도 사 보고 절대로 비를 맞으면 안 된다는 이태리 가방도 사 봤다. 그런데 웬걸 그런 명품을 실제로 써 보니 이것도 아무나 쓰는 게 아니었다. 나 같은 선 머슴에게 명품은 그저 보기 좋은 허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전부 남 줘 버리고 되는 대로 메고 닥치는 대로 입고 다닌다. 그랬더니 뱃속이 다 후련하다.
회사를 다닐 적엔 그나마 남 보는 눈이 있으니 좀 차려입고 멋도 냈는데 코로나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집에서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로 직종 전환을 하니 사철 늘어진 티셔츠에 크록스를 신고 다녀도 됐다. 그런데 여기에 늘 활동량이 남 다른 개들을 데리고 산과 들을 쏘다니다 보니 옷과 신발은 언제나 먼지와 진흙으로 도배 됐다. 그러니 자꾸 언제 버려도 아깝지 않을 옷만 주워 입고 다니게 됐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들 눈에는 내가 꽤 추레한 모양이었다.
언제 한 번은 마음이 바빠 개 산책 나온 차림 그대로 멀리 사는 사촌 언니 심부름을 한 적 있다. 언니가 시킨 일은 다름 아닌 서울 부동산의 십억에서 십오억 대 단독주택 전셋집을 알아보는 것. 땅이니 집이니 보는 것에 무지한 나는 바로 부암동으로 출발해 무작정 눈에 보이는 부동산에 들어가 단독주택 전세를 보러 왔다고 하니 부동산 중개인은 나를 한 번 휙 훑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 눈도 안 마주치고 이 동네 그런 전세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언니가 시킨 대로 유튜브에 보니까 있던데요. 하니까 그가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며 다 팔린 물건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대체 가격을 얼마까지 생각하느냐 하기에 내가 “한 십오억? ” 하자 그가 이제 보란 듯이 얼굴을 구기고 그냥 가는 게 좋겠다고 한다. 그의 행동이 어찌나 냉랭한지 돌아서는 내 얼굴이 무안에 닳아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제야 나는 그의 눈에 지금 내 꼬락서니가 거지 같아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또 한 번은 호텔 식당에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어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관리하는 직원이 후다닥 달려오더니 여기다 차를 대면 어쩌냐고 다짜고짜 언성을 높인다. 그 반응에 놀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투숙객을 만나러 호텔 식당에 가야 하는데 그럼 차를 어디에 대야 하느냐 물으니 주차요원 분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본인이 대신 차를 주차해 줄 테니 일단 내리라고 했다. 그제야 알았다. 당시 내가 입고 있던 주머니 많은 낚시용 싸구려 조끼 때문에 그분 역시 나를 오해했다는 걸.
처음엔 영문을 몰라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좀 서럽기도 하고 속 상하기도 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나도 어지간히 이기적이긴 했다. 사실 이분들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때와 장소에 맞춰 옷을 입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말이다. 희한한 건 누가 나를 이토록 홀대하고 무시해도 화가 별로 안 나는데 이상하게 누가 우리 개 복주를 깔보면 그렇게나 성질이 뻗친다. 요즘 친구들 말을 빌리자면 '발작 버튼'이 제대로 눌린다고나 할까.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니 사랑의 본질이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라서 아닐까 싶다.
또 개 자체를 그냥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그런 가 보다 싶다. 그건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유독 해탈이에겐 관대하고 복주에겐 정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아주 그냥 코에 주먹을 먹이고 단숨에 때려눕혀 머리털을 죄다 숭덩숭덩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는 아마 우리 개 복주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무조건 이 친구를 똥개라고 폄하하는 일에 배알이 꼬여 이러는 게 아닐까 싶다. 한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개를 단순하게 품종으로 구분하고 쉽게 평가한다. 심지어 같이 개를 키우는 사람들 조차 그렇다. 앞서 말했듯 세상의 편견에 쉽게 편승해 ‘진돗개는 좀 그렇지 사납고’ 하면서.
이런 일을 겪은 뒤 나는 복주한테 돈을 쓰기 시작했다. 내 옷은 안 사도 우리 복주한테는 무조건 고급 목줄과 비싼 옷을 사 입혔다. 누가 봐도 우리 복주가 예의 바르게 잘 크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말이다.
그랬더니 어라? 개한테 옷을 입혀 다니자 사람들이 확실히 복주를 예뻐해 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얘는 어떤 종이냐고 묻는 사람도 생겼다. 새삼 사람들 참 간단하다 싶었다. 그깟 옷 쪼가리 하나에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뒤집으니 말이다. 하긴 나부터도 그냥 뭐가 됐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싫다. 당장 나한테 닥친 일이나 심각하지 남일은 늘 쉽게 여긴다.
이 일을 겪으며 나는 평소에 남이 나를 무시해도 괜찮은 마음이 건강한 마음이라고 여겼고 사는 동안 내내 그런 마음 상태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 나도 아니고 내가 키우는 개를 무시하는 게 그렇게 화가 날 수 없었다. 왜 그럴까 한참 생각해 보니, 내가 복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속 상한 것이었다. 만약 복주가 나와 아무 상관없다면 나 역시 무슨 얘길 듣는 교양 있는 얼굴로 너그럽게 반응할 수 있겠지. 그러니 나는 지극히 내 개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명리를 배울 땐 세상 만물에 가치 우열이 없음을 제일 먼저 배운다. 사람 또한 나무처럼 본다. 그래서 사주가 좋고 나쁨을 묻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여긴다. 그래서 나는 사람 또한 좋고 나쁨이 없는데 개라고 다를까 싶다. 서로 다른 우리가 각기 어울려 사는 게 우주를 관통하는 세상의 원칙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니 욕심일지 몰라도 지금보다 조금만 더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