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의 링위에서 복서들은 결정적 한 방을 맞고 나자빠 진다. 상대 선수에게 제대로 얻어맞는 어퍼컷 같은 게 그러하겠다. 하지만 더러는 복서가 방심한 사이 뚫린 가드 사이로 짧게 한 방 들어온 쨉을 맞고 무릎이 꺾이고 상체가 휘청이기도 한다. 그렇다. 그게 또 권투의 묘미다. 한데 권투뿐 아니라 우리네 생도 그렇다. 어떤 일이든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던 작던 언제나 결정적 한 방이 있다. 하여 오늘은 나를 이 조직에서 때려눕힌 결정적 한 방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부서에선 내 밑으로 비서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파견 계약직으로 입사한 이십 대였고 그녀와 나 사이에 중간 직급은 없었다. 해서 까마득히 어린애를 받은 나는 어찌해야 할 줄 몰라 그냥 마냥 잘해주려 애썼다. 이전팀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들에게 다정치 못하게 군 게 마음에 남아, 이번에는 평소 나 답지 않게 꽤 신경 쓰고 잘해줬다.
그녀는 어려서 촌에서 자랐다고 했다. 부모님은 여전히 농사를 하시고, 전문 대 비서학과를 졸업했으며, 여태 이런저런 업체에 파견 계약직으로 근무했고,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덜컥 마음이 기울었다. 나이도 어린데 객지에서 박봉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그녀 얘기가 남 같지 않아 안쓰러웠달까, 해서 그 얘기를 듣고 난 후 나는 더더욱 그녀에게 더 잘해주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별생각 없이 그녀를 데리고 나가 삼계탕집에서 밥을 사주는데 그녀가 말했다. " 저 오늘 삼계탕 처음 먹어요. 전에는 늘 반계탕만 먹었거든요" 그 얘기를 듣는데 어쩌면 좋아, 나는 덜컥 마음이 기울어버렸다. 세상에 이 닭 한 마리 이게 뭐라고 먹고 싶을 때 못 먹나, 하는 생각에 말이다. 하여 나는 그녀에게 밥은 언제라도 사줄 수 있으니 말만 하라고 했다.
그 후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녀에게 최선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녀가 모시는 본부장님께 어렵사리 허락도 받아, 출퇴근 시간도 탄력적으로 조정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일찍 퇴근하게도 해 주며 남는 시간엔 영어 공부하라고 했다. 그뿐인가 어디서 볼펜 하나만 공으로 생겨도 제일 먼저 그녀에게 가져다주고, 매일 그녀를 데리고 다니며 오만 사람에게 인사시키며 이 친구한테 잘해줘라, 진짜 괜찮은 친구다 입이 닳도록 칭찬하고 다녔다.
또 혼자 밥 해 먹고 다니는 게 딱해 안 그래도 되는데 굳이 데리고 다니며 밥이니 커피니 끊기지 않게사 먹였다. 그리고 회사에서 맘 터놓고 지낼 또래 친구도 사귀라고 점심시간엔 따로 신용카드도 내주었다. 나로서는 정말로 한치의 의심 없는 선의였다. 그뿐인가, 나는 백날천날 그녀의 처우 개선까지 미리미리 고민했다. 고용불안 없는 환경에서 그녀가 제대로 대우받으며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정말 열심히도 알아봤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끝까지 이런 내 진심을 믿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내 실수도 컸다. 어쩌자고 처음부터 덮어놓고 그녀를 믿었는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기에 같은 팀에 근무하는 나의 연적들과의 악연에 대해서도 그녀에게 말했다. 물론 그녀에게 나와 상관없이 그들과 잘 지내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고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이 조직에 무사 안착했고, 부서장의 비서로 사내에서 입지를 다져갔다. 한데 그러는 사이 나는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르겠다. 그녀가 어떤 계기로 그렇게 행동 하기 시작했는지, 정말로 다른 사람들 말처럼 그들을 통해 내 얘기를 나쁘게 전해 들어 그랬는지, 그도 아니라면 단순하게 내게 따로 크게 실망한 게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하여간 그녀는 그 무렵부터 내게서 멀어져 갔고, 끝내 내게 달갑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예컨대 본인이 업무 중 실수한 걸 두고, 그것은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니라 애초에 내가 잘못 가르쳐줘서 그렇게 된 거라는 둥, 그래 뭐 좋다. 그 말도 일리가 있으니, 하지만 불행히도 그 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어느 날은 그녀가 내게 할 말 있으니 차 한잔 하자고 해 따라갔다. 그랬더니 그녀는 내게 한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전문 비서 출신인 자신과 부서장 사이에서 비서 출신도 아닌 당신이 왜 끼어들어 자신의 일을 망치냐는 듯, 따지고 들었다. 아마 그녀는 나 때문에 자신이 부서장에게 인정을 덜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데 그녀 업무의 총괄 책임은 나였다. 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거뿐이었다.
모르겠다. 이 일을 좋게 생각하면 이 친구가 일에 욕심을 내서 이러나 보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내 입에서는 차마 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여 나는 그녀 얘기를 다 들어준 후, 다시 한번 그녀에게 서로의 역할에 대해 차분히 설명을 해 주고는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마음에 없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어찌나 머리가 아프던지, 그 후로 꼬박 이틀간 극심한 편두통을 앓았다.
그러고도 그녀는 뭐가 또 성에 안찼는지, 끝내 내 감정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그건 바로 내 앞에서 나 보라는 투로 부러 B 하고 시시덕거리고 장난을 치고 이들과 아삼육이 되어 어울리며 내가 하는 하는 말은 귓등으로 흘려듣는 짓이었다. 그런 일까지 당하자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좋다. 네가 원한다면, 우리의 관계도 처음으로 다시 돌려놓는 거다. 했다. 하여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주었던 모든 호의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는 윗분들께 허락을 맡고 그간 그녀에게 주던 유연근무제를 없애고, 회사의 본래 원칙인 나인 투 식스로 출퇴근 시간을 바꿨다. 가뜩이나 인사팀에서 이 일을 두고 예외라며 못마땅해하던 터였다. 잘됐다. 또 그녀의 업무 범위도 대폭 줄였다. 사실 그녀에게 내 나름대로 다양한 업무를 줬던 건, 그녀 말처럼 그녀를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그녀가 정직원으로 전환될지도 모르니, 그때 유리할까 싶어 미리 준비한 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두고 비서 업무 외에 잡다한 일을 시킬 거면 애초에 사무 보조를 뽑을 일이지 왜 비서를 뽑았느냐고 내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니 그 일 주면 안 된다. 사실 그 일들 전부 내가 직접 하는 게 더 편하다, 해서 그 일도 도로 가져왔다.
또 마지막으로는 그 회사를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를 절대로 재계약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차피 현행 노동법 때문에 재계약 자체가 불법이라 애초에 안 되는 일이지만, 사람일이라는 게 또 혹시 모르는 거니깐
한데 말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녀도 참 안타깝다. 그녀 생각에는 나 같은 거 제치고, 바로 부서장께 인정받으면 그만이라 생각했겠지만, 천만에,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착각이다. 당연하다. 윗사람들은 다른 업무들로 바쁘기 때문에 계약직 사원인 그녀한테까지 일일이 신경 쓸 시간 없다. 하여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평가는 직속 상사인 내 의견을 신뢰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정말 이 조직에서 인정받고 싶었다면 제일 먼저 나한테 잘 보였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 누가 직속 상사인 내 보증 없이 그녀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겠는가.
그리고 말이다. 내가 아무리 한 물 갔다 한들, 나름 그 조직에서 20년간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말 그대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눈을 감고 찾아오래도 찾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나를 굳이 카운터 파트에 세워야 했을까?
사실 나는 그녀가 2년간 성실하게 자기 업무 잘해 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직원 만들어주려고 했다. 아마 내 성격에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사내에 비정규직 전환 관련 노조라도 차렸을 거다. 만약 이 일 마저 여의치 않았다면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다른 좋은 일자리라도 소개해줬을 거다. 하지만 이제 싫다. 정말이지 이제 더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며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중요한 건, 어쩐지 이 일 때문에 이 악물고 버텨오던 무릎이 한순간 훅하고 꺾여버렸다는 데 있다. 그간 더한 일을 겪어도 기를 쓰고 버텼는데, 이 일까지 겪고 나니 어쩐지 맥이 탁 풀려버렸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앞으로 나는 회사에서 영영 이런 식의 날들을 보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달까, 이제는 그냥 오며 가며 아무나 한 번씩 툭툭 쳐보는 그런 사람이 됐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달까, 해서 나는 이때부터 진지하게 퇴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