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원 근처에 살던 파란 눈의 노란 머리 여자아이 둘이 자전거를 타고 근처를 지나가다 우연히 이 집 아가들이 운동장에서 노는 것을 보고 이곳에 고아원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 후로 소녀들은 주말마다 이곳에 와 아이들을 돌봤다. 미국에서 왔다던 둘은 자매였는데 진심으로 아이들을 예뻐했다. 그러더니 얼마 후엔 이 친구들이 다니는 외국인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이곳에 놀러 오고, 그다음엔 숫제 그 학교 내에 봉사동아리가 생겨, 학교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봉사를 오게 됐다.
이듬해 소녀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이 학교 학생들은 여전히 이곳에 봉사를 오고 있다. 성심원 꼬마들은 이제 그 친구들을 "영어 형아들"이라고 부르며 잘 따른다.
처음 앤디 선생님을 본 날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해 질 무렵 잠투정이 심한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보육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키가 이 미터쯤 돼 보이는 하얀 속눈썹이 꽤나 인상적인 앤디 선생님이 내 쪽으로 걸어와 이렇게 물었다. 시스터 요핸슨 어디 계시냐고, 시스터 요핸슨?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우리 수녀님들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중에 알았다. 앤디 선생님이 찾던 시스터 요핸슨은 우리말로 요한 수녀님이었다는 것을.
앤디가 성심원에 오게 된 건 앞서 말한 소녀들 덕분이었다. 평소에 이런 일에 관심 많던 그는 소녀들이 주말에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놀았다는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고, 성심원에 전화해 어떻게 자신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 확인하고는 이곳에 그날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앤디는 영국 출신의 외국인 학교 교사였다. 그는 이미 한국에 오기 전부터 꽤 여러 나라를 돌며 불우한 환경에 놓인 아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도왔다고 했다. 볼리비아에서 캄보디아까지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녔고, 그러다 봉사 중 만난 한국인 아내와 결혼 해 지금은 이곳에 있는 거라고 했다.
앤디 선생님이 그 일에 전면적으로 나서자, 일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전에는 주먹구구식으로 드나들던 외국인 학교 학생들도 그다음부터는 체계적으로 봉사를 왔다. 또 이 친구들의 방문에 꼬마들은 호기심을 보였다. 아마도 이들이 주고받는 낯선 이국의 언어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외국인 학교 친구들 역시 이 일에 열심히였다. 성심원에 오기 전에 자기들끼리 모여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해 왔다. 어떤 날은 기타를 가져와 동요를 불러주기도 했고, 어떤 날은 종이 접기를, 또 어떤 날엔 미니 축구를 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던 처음 일 년간은 얼결에 내가 이 일을 맡아했다. 물론 그쪽에서도 선생님이 아이들을 따라오긴 했지만, 시설쪽에서도 이들에게 대응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데 당시 보육원에서는 이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집의 관리 인원은 늘 최소한으로 움직였기에, 노는 손을 찾으래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나는 그때 이 일까지?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일이 궤도에 오르자, 나는 다른 욕심이 났다. 이제 숫제 그 학교에, 흑인 혼혈 아동인 지욱이(가명)를 입학시키고 싶어 졌다. 해서 어느 날 앤디 선생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 우리나라에서 장사해서 돈 벌잖아. 그러니까 너네 학교에서 이 집 아이 하나만 공짜로 가르쳐 줘" (영어를 잘 못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앤디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말했다. 본인도 평소에 궁금했다고, 어째서 한국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장학제도가 없는지, 그러더니 그는 학교에 가서 이 일에 대해 정식으로 논의하고, 이사회 멤버를 설득해, 장학제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오는데 어찌나 기분이 째지던지, 앤디의 말에 잔뜩 들뜬 나는 우리 수녀님들과 함께 콧노래를 불러가며, 피부색이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더 짙은 지욱이가 어째서 외국인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그 이유를 구구절절 적은 아이 소개자료를 힘든 줄도 모르고 밤새 작성했다.
그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앤디가 어두운 얼굴로 나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선생님들은 전부 네 얘기에 동의해, 심지어 이사회 멤버들까지 다 동의해. 그런데 말이야. 결정적으로 이 학교 오너가 한국 사람이야. 그가 반대해. 그는 아이들을 오직 달러로 보는 사람이야. 나는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했어. (당시 그 학교 초등학교 등록금이 대학 등록금보다 비쌌다)
이상하지, 앤디의 다른 모든 말엔 반박할 말이 생각났는데, 그 학교 오너가 한국인이라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혀 더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대신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포기하지 마. 한국에 있는 다른 외국인 학교도 찾아 가 계속 문을 두드려. 나도 전에 볼리비아에서 이런 비슷한 일을 겪었어. 거의 매일 거절당했어. 아무도 길에서 먹고 자는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돈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지. 나는 매일 아침 대저택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어. 늘 거절당했지. 그래도 계속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려 끝내 문을 열어주는 곳을 찾았어. 그러니까 너도 해 봐. 반드시 어느 한 곳은 지욱이한테 기회를 줄 거야. 절대 포기하지 마.
결론부터 말하면, 앤디의 말대로, 대한민국의 외국인 학교를 싹 다 찾아 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보기 좋게 전부 거절당했다. 그리고 이들이 보낸 회신 메일을 열어 볼 때마다, 나는 매일 새롭게 바위에 가 부딪히는 계란의 심정이 되곤 했다.
그 후 나는 이 일을 부러 잊고 지냈다. 괜히 떠올려봤자, 마음만 새록새록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요즘 전쟁직후 쓰여진 보육원 창설자 신부님의 일기를 읽는데 문득, 수 없이 많은 날, 앤디 못지않게 거절당하고 다니셨을 신부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이 일이 자연스레 다시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우리 신부님께서도 한 평생 해 오신 일역 시 이런저런 일로 남에게 도움을 청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한 평생 그 많은 애들을 건사하고 사시려니, 본의 아니게 이곳저곳에 부탁을 많이 하고 사셨겠지.
할머니 수녀님께서 그러시는데, 언제 한 번은 신부님께서 오랜 시간 약속 잡고 기다려 어렵게 만난 어떤 한 미군 장교로부터 편지봉투 하나를 건네받았는데, 그 안에 돈은 고사하고 자기가 쓰고 버린 녹슨 면도칼과 클립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단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그에게 끝까지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오셨다고 한다.
아마 신부님께서는 늘 당신의 체면보다 아이들이 먼저였기에, 녹슨 면도칼처럼 비겁한 거절 앞에서도 의연하고 담대하셨던 것 같다. 하긴 용기 없는 덕성 같은 건 세상에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그러니 그 힘으로 신부님께서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아이들을 위해 걷고 또 걸으신 건지도 모르겠다. 감히 나는 짐작도 못 해 보는 그 길을, 누구도 원망치 않으며, 끝까지 묵묵히 아이들을 등에 업고 말이다.
* 지욱이를 위해 당시 KIS (Korea International School) 봉사단 멤버였던, 방무창 학생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