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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연 May 31. 2024

신호등

날씨가 화창한 오후 길을 걷는데 저 멀리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어차피 거리가 꽤 되니 다음에 건너야겠다고 생각하며 여유롭게 가던 길을 갔다. 그런데 만약 신호등이 좀 더 가까웠다면 건너지 못한 게 꽤나 아까웠겠지. 어쩌면 그런 일들로 한순간 기분을 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바로 눈앞에서 놓쳐버리는 것만큼 아까운 게 없다. 그래서 그동안 눈앞에서 놓쳐버린 모든 것들이 그토록 후회와 미련으로 남았을까. 마치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걸 가지지 못한 것처럼. 생각해 보면 애초에 가져본 적도 없었던 건데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무언가를 완전히 헌신적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영화를 수십 번씩 본다는데, 나는 그런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를 하나만 말해보라는 질문은 항상 곤혹이었다. 좋아하는 것들은 많지만 가장 좋아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게 나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사랑하는 게 없다는 것. 눈앞에서 초록불이 깜빡이고 있는 것처럼 아직도 사랑하는 게 없다는 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런 나에게 얼마 전 사랑하는 도시가 생겼다. 그동안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그곳이 좋았지만 사랑한다는 감정이 든 적은 없었는데, 나에게도 그런 도시가 생겼다. 그곳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였구나. 느리더라도 사랑하는 것들이 생기고 있다는 건 참 다행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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