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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as Jul 25. 2023

부산 촌놈 인생

세상에 맨몸으로 떨어진 씨앗(행운)

바람에 날리는 씨앗은 내릴 곳을 선택하지 않는다

소나무는 바람에 씨앗을 날려 종족을 번식한다. 매년 봄 4~5월이면 송홧가루가 날린다. 벌이나 나비 등 곤충을 이용해 수분하는 다른 꽃과는 달리 바람을 타고 종족을 번식하는 풍매화이다. 노란 연두빛 가루는 봄철 알레르기를 유발한다고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실제는 비타민 P(풀라보노이드)로 인해 항균, 항암, 항염작용을 하며 신진대사 기능을 촉진시킨다. 거기에 더해 모세혈관을 강화시키고 혈관을 확장시키며 비타민 C의 기능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가루의 크기는 미세먼지 정도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 작은 것들이 수분이 되어 씨앗이 되는 것이다. 솔방울을 벗어난 씨앗은 바람을 타고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자신을 낳아 준 숲으로 부터 멀리까지 날아간다. 부모, 가정으로 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과 의지와 무관하게 바람이 이끄는 곳까지 맨 몸으로 날아간다.

우리들 인간을 그들에 비유하면 어떨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무심코 들기도 한다. 선택할 수 없는 부모님, 물론 부모님도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 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데 건강하기까지 하니 더욱 감사할 일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을 공짜로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걸 깨닫고 인식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근 50세가 되어서야 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생각되던 것들과 불만인 것들로 나뉜 프레임 속에서 세상을 보았다. 나쁘지 않은 머리, 팔다리 다 있고 신체기능이 정상이고 건강한 것들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머지는 불만이었다. 많이 배우지 못하신데다 부자는 커녕 매일매일을 생존을 위한 경제 활동으로 바쁜 가정 환경이 마음에 안들었다.

이런걸 느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였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니까 일단 입학할때부터 차이를 느꼈다. 다른애들은 엄마들이 따로 오는데 나는 혼자 갔다. 엄마께서 일하러 가셔서. 애들 옷도 달랐다. 나는 전날 어머니가 옷 사줬는데 쉽게 말하면 노메이커. 선생님들도 차별 대우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도 올 형편이 안되고 옷도 그렇고 그냥 그렇게 혼자 느껴졌던것 같다. 선생님도 그랬던것같아 있는 집 자식들.. 이름한번 더 부르고 머리 한번 더 쓰다듬고.. 저학년때 까지는 그런 사랑 인정을 못받으니까 왠지 좀 그랬다.


중학교 가려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돈을 받았다. 다른 애들은 참고서 사고 다 그렇게 샀는데 난 몰랐다 그래서 다시 돈을 받아서 헌책방에서 참고서를 사 공부했다. 나중에 보니까 참고서에서 숫자만 바꿔서 낸 문제도 틀리는 애들 보고 애들이 멍청하구나 느꼈다. 선진국에 대해서 들었다. 일 안해도 돈 주고. 반면 우리나라는 출근 못하면 월급에서 까이고.. 친구들 잘 사는 애들끼리는 집에 놀러가고, 생일엔 케잌도 받고 , 생소했다. 그땐 생일에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미역국만 먹어왔다.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초등학교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4~5학년때즈음 아버지가 공군 대위인 남자애가 거들먹대고 선생도 잘해줬다. 언제 한번은 그 남자애가 날 쳤다. 그래서 기분도 나쁜 상태에서 건들길래 두 세대 때려줬다. 그랬더니 선생한테 이르더라. 그래서 정직하게 말했다. 얘가 시비걸어서 한대 맞고 두대 때렸다.


그때 인식으로는 선생님이 애가 집도 잘살고 그래서 나를 혼낼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그애를 먼저 혼내더라. 그다음에 나에게 왜이렇게 세게 때렸냐고 혼내길래.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내 초등학교 동창 얘기 들어보면 학교다닐때 내가 말이 없었다고들 한다. 왜냐면 선생의 차별대우 등등 너무 싫었다. 지들끼리 느그엄마 우리엄마 하면서 소풍갈때 반찬 얘기하는 것도 싫었다. 반장하면 헌신을 해야하는데 그럴 형편도 안되서 생각도 안했다. 그 당시 되게 귀하게 자란 여자아이가 있었다.



황순원 아저씨의 소나기에 나올법하게 생긴. 우리와 노는 것도 달랐다. 그 당시 쟤들은 나완 다른 세상에 사는 애들이라 생각했다. 근데 내가 중학교에 갔는데 애들이 반장을 하라했지만 거부했다. 그때 선생이 물어봤다. 나는 그때 해서 뭐하냐 형편도 안되고 떠든 애들 이름이나 적어봐야 뭐하냐고 말했다. 근데 선생이 초딩때나 그런거 필요하지 중딩때는 그런게 필요없다고했다. 그리고 며칠뒤 반장 선거에서 반장이 되고 3년동안 반장을 했다.



당시 반애들한테 돈 많고 멍청한 애들한테 시험 문제 답을 조금 보여줬다. 근데 오는게 있으면 가는게 있어야하는데 그런게 없는 애들은 걸러서 보여줬다. 2학년 때는 부회장을 했었는데 해보니까 회의만 끌려가고 하는게 없다. 그때부터 회의가 싫었던것 같다. 선도부장도 했었는데 교문앞에 서있으면서 첫사랑을 만나게 되었다. 남자의 첫사랑은 마음 속 영원한 소녀이다. 단테도 신곡에서 그랬다. 나의 베아트리체.. 중학교때 나는 뭐지 이런생각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내 주변엔 내가 생각해도 뭐가 없었다.


이때 내가 뭔가를 해야겠단 생각을 가졌다. 근데 중딩때 가장 마음이 안좋았던 일이 있었는데 영어 리스닝을 100점 만점에 20점을 맞았다. 그당시 리스닝을 테이프로 들어야했는데 너무 비싸서 말할 엄두가 안났다. 알파벳도 중학교 넘어갈때 땟는데 리스닝은 아무리 해도 안됐다. 그래서 친구들한테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절대 안빌려줬다. 다른 이들이 성장하려는 기회를 주지않고 자신들이 독차지하려는 심보였다.



그때 상처가 컸다. 그 당시엔 상처가 커서 그들을 괴롭혔다. 소이 말하는 왕따를 시켰다. 걔네랑 놀지 말라하고 그들을 껴주려하면 갈시하고 거들먹 거리는 애들을 특히 싫어했다. 지금도 비슷하다. 집안이 어렵더라도 자신이 노력하는 사람이 좋다. 그렇게 중학교까지 불평,불만 반항적 정서를 가진 아이로 성장했다. 사회의 틀 기득권 통념들에 대해서 순응은 하지만 기회만 되면 바꾸려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때 가정방문이 있었다. 이때 부모님 돈을 채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정말 화가 났고, 세상이 너무 불공정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2학년 담임이 집에 온적이 있다. 지금도 그 쌤 식사



사드리고 하는데.. 그 당시에 우리 동네는 중하층 동네이고 선생은 지성인이었다. 계급차이가 컸다. 그분은 집에 오자마자 큰절을 했고 어머니가 내민 돈봉투도 마다했다. 고1때 선생님은 학교로 어머니를 부르고 나를 서울대로 보내겠다는 명목으로 5만원을 갈취해갔다. 정반대였다. 고3때 쌤은 아예 오라가라도 안했다. 중학교3학년땐 그런일도 있었다. 똑같이 둘이 잘못했는데 한놈은 봐주고 한놈은 쥐잡듯 잡고.. 너무 싫어서 조례 시간에 인사도 안했다. 선생님도 눈치채셨는지 부반장을 부르는데 내가 째려보니까 눈치보더니 다시 앉는다. 일주일 뒤에 체육 담당쌤이 날 불렀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 때 쌤이 말했다. 비록 맘에 안들어도 규율이 있으니 원칙에 따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다시 인사를 했던것같다. 그때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무엇에 씨앗인가? 나는 추노시절 하층 계급 노비라는 생각도 했고 있는 놈들이 더하고 못배우고 모난 사람들을 순응하고 사는게 답답했고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전세 월세에 전전긍긍했는데 아들이 2이라고 세를 안주려했다. 집에 낙서하고 뭐 그럴까봐.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그런것으로 투덜 거릴때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나는 피해 안주고 그렇게 살았는데 부모님이 우리 탓을 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동생은 물론 정반대였지만.. 그 당시 동생이 어디가서 맞고 오는 경우 꼭 보복해주었다.



힘세다고 약자를 건드리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좀 그랬다. 사실은 내가 어릴때 축구선수를 하고싶었다. 그런데 동생이 또 축구를 하겠다고 했다. 동생이.한다길래 동생을 밀어주었다. 돈이 동생한테 다 가서 질투도 났고 원망이 들었다. 나는 돈아낄라고 시사 테이프도 안사고 아끼고했는데...

그러면서 나는 무엇인가. 혼돈의 카오스에 붙잡혀있었다. 집에서도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별로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불평등에 순응해야만 했던 씨앗. -나는 무엇에 씨앗인가

-어떤 땅에서 자라야 할까?

어릴때는 부족함 없이 자라는 것이 살면 좋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릴때 아버지 일하시고 한잔 하시고 들어오시면 술 주정도 하셨다. 삶이 힘든거야.. 그리고 자신의 삶에대한 후회, 그런데 당장의 먹고살고 살리기 위해 풀때가 없었던 거였다. 주변 눈치도 보고.. 그러다가 술을 마시면 속사정이 나오는 거였던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도 그러셨다고 그랬다. 내가 봤을때 동생만 아니였으면 보따리 싸매고 가셨을 것이었다. 삶이 고되서 .. 근데 당시 부모가 이혼했다고 하면 이슈가 크고 보호 관심 병사가 될 정도로 이혼이라는 것이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 아이엠에프시기..

그 당시에 친구들 보면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애들이 지금보니까 반듯했다. 간혹가다가 좀 아닌 애들도 있었지만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애들이 반듯하다. 되게 부러웠던 아이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사고 어머니가 대학교수였다. 근데 그자식이 한번은 우리집에와서 밥먹고 찬밥먹었다고 학교에서 떠들어서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는데 가끔 연락온다. 공부를 되게 못해서 해외로 유학을 갔다.



그런데 그 머리로 유학을 가봤자 잘 되지 못하고 차 튜닝샵에 있을것이다. 또 되게 순하게 살았던 어떤 애는 대학교 시간 강사 이런것을 하는애였고 또 어떤애는 학원 강사를 해가지고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던 아이었다. 근데 결국은 이런것같다. 어떤 땅에서 크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중요한 것 같다.

모든 게 갖추어진 적절한 햇빛 습도 온도 그렇게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식물들은 잘 큰다. 그러나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거나 태풍에 날아가면 그런 식물들은 다 죽는다. 이런말이 있다. 잡초같은 생명력..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것들은 좋은 환경보단 열악한 곳에서 강인하게 자란다.

아플수록 뿌리는깊어진다.
씨앗 한개는 좋은 토양에 내려앉아 무럭무럭 자랐지만 바위틈에 내려간 씨앗에서 큰 소나무는 바람도 많이 받고 차갑고 영양분도 잘 못받고.. 힘들게 자랐다 그러나 태풍 한번 치자 좋은 토양에서 자란 소나무는 단번에 날아가고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는 견뎌냈다.

아저씨들 장기두는 것을 초딩때 구경한 적이 있다. 그럼 아저씨들이 물어본다. 장기 잘 두니? 그럼 대답했다 잘 못두는데 둘줄은 압니다. 그럼 아저씨들은 내기를 하자했고 승낙해서 5천원씩 아저씨들에게 받아내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돈이 없었으니까 그렇게라도 벌었다. 그런 부분이 나한테는 상처였다. 지금생각해보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부모님은 명절 이럴때 돈 아껴서 메이커 하나라도 사주시려하셨다.

내가 알아서 크는 걸 좋아한 사람들

중학교 부턴가 아버지 회사에서 장학금을 줬다. 집에 살림에 보탬도 되고 용돈도 받고자해서 열심히 해서 내면 부모님이 몹씨 좋아하셨다. 당시엔 그 정도로도 만족했다. 근데 고등학교가서부터는 이랬다. 나하고 사촌형하고 이렇게 있었는데 외삼촌들이 하숙을 했다. 외삼촌이 되게 공부를 잘했다. 고등학교 문과 일 이등하는 사람이었다. 그당시 공부 못한 나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뭐 무시하고 했는데,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가 그랬다. 자기 친척오빠는 공부잘해서 우리나라에서 인정하는 의대에 다닌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는 공부를 정말 피 터지게 했던것 같다. 그리고 그것 때문이었는지 내가 육사 시험본다고 이러니까 아버지 회사에서 이사가 육사에 다니시다가 짤리신 분이었다. 이분이 내가 육사에 간단 소식을 듣자 보태쓰라고 용돈을 주셨다. 당시 군 출신 대통령이 2번이나 임관해있을때였고 3번째도 그렇게 될수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사관학교 졸업하거나 수료때 이 양반이 또 따로 불러선 아버지께 돈을 주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되게 좋아하셨다.
당시 학교를 관두고자 했던 시기도 있었는데 다시 재수하면 집에 부담이 될 것같고 일반 대학을 가고자하니 지방대는 가기 싫고 서울쪽은 돈이 안돼서 마음은 힘들지만 버티고 버텼다. 한번씩 휴가때 집에 오면 부모님이 되게 좋아하셨다. 내가 육사를 다닌다는 자체를.



그리고 어머니께서 가끔 계모임 가시면 우리 아들을 사위삼고 싶어하셨다. 그러나 딸들 못생겼더만 하며 거절하던 어머니는 굉장히 기분좋아하셨다.

그리고 소위임관하니 진짜 장교가 나왔다며 굉장히 좋아하셨다. 소위임관하고 보니 재밌고 월급받으면서 재밌게 보냈다. 그리고 중위때는 아버지가 육사때 나에게 지급했던 50만원을 보내주시고 그 돈을 다 갚음으로서 완전히 독립했다. 그당시 군에서 인정받고 지휘하고 참모로도 가 화생방 측정 이런것을 해 1등을 하고 그러니 거만해지고 희열감도 느꼈다. 당시에 그랬다.



지오피 끝나니 지피 비무장 지대에 갔다. 당시에 색다른 것을 하니 재밌었고 이때 아니면 못한다는 마음에 설레는 마음으로 했다.그것도 강원도 최북단 전선에서.. 언제든 북을 마주할수 있는 곳에서. 그때는 북에서 불이 나면 스피커를 북쪽으로 돌려 노래 잘하는 놈들에게 불놀이야 노래를 부르게 시켰다. 이때 지피를 갔다 다시 내려오니 군기가 문란했는데 호주머니에 손도 넣고 다니는 애들 불러다가 주머니를 꼬매게 시켰다. 대대장때는 점호시간에 아침에 상의 탈의를 시키고 먼저 벗었다. 그리곤 체조를 하고 뛰었다. 강원도 건봉사에서 턴해야하는데 턴하면서 보니까 런닝착용하고 귀마개하고 내복입은 놈들이 보였다. 그때 내가 말했다. 제자리 뛰기를 시켰다. 그랬더니 뒤에서 전역 얼마 안남은 애들이 에이씨 하며 쏘가리라는 욕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뒤로 설레설레 갔다. 그곳에 병장 몇놈이 모여있었다. 눈을 안 마주치길래 나오라했다. 얼차례를 시켰더니 어영부영 하길래 몇차례 계속 시켰던 경험이 있다.
그랬더니 그들이 제대도 얼마 안남앗는데 짧게 하겠다길래 알겠다하곤 대가리를 박으라했다. 바로 날라차기 두놈을 날렸다. 귀도리 런닝 탈의하라했다. 일어서려고 하길래 다시 날라차기를 날렸다 그랬더니 그 자세로 잘 하더라. 그리곤 일으키고 바로 앞줄로 가서 같이 뛰었다. 다음날부턴 군기가 바싹 들어선 제대로 했다. 더 중요한 건 내가 가면 애들이 안보였다. 그리고 소대에선 나를 떠받들어했다. 느그는 내새끼 아니냐 근데 나는 너네가 걔네랑 똑같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 말했다. 내가 그러고 나선 다른 부대 파견 갔다가 왔다. 그때 당직 사령을 들어갔는데 점호간 기타치고 바둑둔 아이들을 나오라했다. 판초우의 들고 연병장에 나가서 기타치고 바둑둔 친구들을 다음날 아침까지 하라고했다. 라면끓이는 애들도 하루종일 끓이라했다. 대대장님 오시기 전까진 내 근무이고 내가 부대 지휘관이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대대장님도 상황을 설명 해주니 잘했다고 하시면서 언제까지 할 것이냐 물어보셨다. 1시간 남짓 남은 근무시간동안 시키겠다고 말씀드렸다. 그후 애들한테 해야할때아 하지말아야 할때를 구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심했다.

남들의 시선으로 본 나에 대해 어릴적 어머니의 눈 소위시절 그리고 대대장 시절 ( 그시절로 돌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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