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밍 Feb 07. 2018

#75 <엘리펀트> 먼저, 사람이 있다.


*영화 <엘리펀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존과 일라이어스 <엘리펀트> 스틸컷


 종종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사건이 '소재'로만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더군다나 사건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욱더 참혹하게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 속 재현의 폭력이 가하는 2차 가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프로불편러로 몰아가는 시선 또한 존재한다. 어찌 되었든 영화는 허구라는 이유에서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는 그런 영화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1999년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을 바탕으로 했지만 잔혹함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피해자들이 총을 맞을 때 이를 클로즈업하거나 슬로 모션으로 관객을 자극하지 않는다. 빗발치는 총소리, 선혈이 낭자한 모습 등 끔찍한 실화를 재현해낸 영화들의 클리셰도 찾아볼 수 없다. 상황만을 담아낼 뿐이다. 


알렉스와 에릭. <엘리펀트> 스틸


 대신 영화는 사람에 집중한다. 81분에 불과한 러닝타임 중 60분 정도를 소요해 학생들을 비춘다. 영화는 학생들의 이름을 화면에 먼저 띄운 후 이야기를 시작한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둔 존, 사진을 좋아하는 일라이어스,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는 네이썬과 캐리, 존이 힘들 때 힘을 주었던 아카디아, 난사사건의 범인인 에릭과 알렉스, 친구들에게 루저라고 손가락질받는 미셸, 살찌는 기분을 제일 싫어하는 브리태니와 조든 그리고 니콜, 친구들과 반대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베니의 사건 직전을 담았다. 


 카메라는 학생들의 뒤통수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뒷모습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시선과 겹쳐진다. 이내 관객은 관찰자의 신분을 벗어나 영화 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사건은 이제 '우리의 상황'이 된다. 나와 함께 수업을 듣는 에릭과 알렉스가 총을 쏴 사람들을 죽이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내 사진을 찍어주었던 일라이어스가 죽음을 당하는 그런 상황에 놓인다. 


 <엘리펀트>는 상황을 더 잔혹하게 만들거나 슬픔을 끌어내려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 상황은 상황으로 놔두는 게 가장 최선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총기 난사를 다루는 비중은 영화의 사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당시의 분위기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진다. 


사람이 있고, 그다음에 사건이 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히로카즈 감독이 말했듯,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사람과 사건의 순서를 혼동하고, 사건 자체에 함몰된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영화인가. <엘리펀트>는 사람을 먼저 담았다. 이는 <엘리펀트>가 명작이라 불리는 이유이자, 줄거리를 훑기 바쁜 영화들 사이에 <엘리펀트>가 돋보이는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73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사랑의 의지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