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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Sep 14. 2020

진짜 '술'례길의 시작

산티아고'술'례길 2일 차(1) - 취한 채 걸으면 기분이 조크등요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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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2일차
2018. 5. 15. 화요일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수비리(Zubiri) 26.4km



 안개와 함께 걷는 길

  산티아고 순례길의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숲은 군데군데 안개로 덮여있었고, 비를 머금은 숲에서는 한껏 숲 냄새가 피어올랐다. 걸을 때마다 폭신한 진흙으로 발이 꺼지는 순간과 얼굴 전체를 감싸는 습기조차 경이로웠다. 아침 햇볕은 짙게 깔린 안개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은은하게 숲을 밝혔다. 순례자들은 걷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계속 나아가야 하는 길에서 나는 번번이 멈춰 섰다. 커다란 풍경이 마음을 퉁-치며 가득 들어올 땐 멈춰서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오래 멈추며 눈으로 풍경을 담았다. 흩날리는 안개들과 저 멀리 떼를 지어 모여있는 양들, 끝없이 펼쳐진 초원, 비에 젖은 나뭇잎은 오래 머물며 바라볼수록 빛이 났다. 내가 걸음을 멈추는 순간들마다, 역설적으로 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실감했다.


안개가 빚어낸 아름다운 풍경들



모닝 맥주 - 오늘의 1차

 하루 동안 산티아고를 걷고 나서 깨달은 건, 길거리에 있는 바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거였다. 오전 내내 걸으며 바가 나오기만을 벼렸는데 드디어 내 눈앞에 바가 하나 보였다. 테라스가 있고 사람이 북적북적한 산티아고 여행기에서 보고 꿈꿔왔던 바로 그 바였다.



 바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모두가 한편에 등산 스틱과 가방, 우비를 벗어놓고는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바에 막 도착한 사람들의 안도의 한숨이나, 낑낑거리며 등산화를 벗어던지는 사람들의 소리, 저 옆 테이블에서 맥주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한데 섞여 와글거렸다. 시계를 보니 오전 열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주 바람직했다. 아침부터 맥주 한 잔 하는 삶, 내가 바라 왔던 산티아고'술'례길 라이프가 바로 여기 이곳에 펼쳐지고 있었다.


 재빠르게 맥주와 오믈렛, 샌드위치를 시키고, 맥주를 먼저 줄까?라고 물어보는 직원의 말에 할 수 있는 모든 긍정어를 마구 내뱉었다. "Yes, Oui, oui(불어), Si, Si(스페인어)" 점원은 웃으며 잔 가득 맥주를 담아내어 주었다. 세상에, 인심도 후하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니 빈속이 찌르르했다. 쌉싸래한 청량감과 보리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물을 마실 필요도 없는 완벽한 한 잔이었다. 백번 생각해도 여기에 오길 잘했다. 한 잔을 더 마시고 길을 나섰다.


이 모든 구성이 단돈 6.30유로!
색색깔의 우비들과 함께 걷는 길


감격의 상봉 - 오늘의 2차(부제:샹그리아 쳐돌이의 시작)

 걷다 보니 술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기분 좋은 노곤함이 금세 몸에 퍼지고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른 시간에 마신 맥주 탓인지 평소엔 오르지 않는 열이 얼굴에 올랐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달뜬 얼굴을 스쳤다. 꽤 기분이 좋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Buen Camino'하며 인사를 건넸다. 술도 들어갔겠다 기분이 째질듯한 나는 함박미소로 모두에게 답인사를 건넸다. 목소리의 톤이 아침보다는 세 톤 정도 높아진 것 같았다. 배낭이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바람이 내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저 멀리 푸드트럭이 보였다. 촉이 왔다.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예감은 적중했다. 여기가 내가 본 그곳이 맞았다. 샹그리아가 정말 단돈 1유로였다. 벅찬 마음에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걸 애써 참고 경건하게 한 모금 머금었다. 일순간, 배스킨라빈스 슈팅스타의 사탕들이 톡톡 터지듯 풍부한 향과 맛이 입안 곳곳을 한 번에 에웠다. 인상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찐맛이었다. 향긋하면서도 씁쓸하고, 묵직하면서도 해갈될 만큼 청량한 완벽한 완전음식이었다. 두 잔만 마시기는 너무너무 아쉬웠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는 영영 수비리에 도착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얼른 걸을 채비를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샹그리아 푸드트럭, 샹그리아는 마시기 바빠(5분컷) 사진을 깜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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