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밍 Sep 17. 2020

나의 도가니에 치-얼스

산티아고'술'례길 2일차(2) - 하루의 마무으리는 파티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이전 글 : #7 진짜 '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9


산티아고 순례길 2일차
2018. 5. 15. 화요일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수비리(Zubiri) 26.4km


수비리 가는 길은 이쪽입니다


안녕, 나의 도가니

 샹그리아를 먹을 때까지만 해도 행복했는데 산길에 접어들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건 절망이었다. 오늘 루트에 400~500m 정도 높이의 내리막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길이 가파를지는 몰랐다. 문제는 내가 아직도 등산 스틱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실용성 없는 등산 스틱과, 평소 너무 많이 접질러 인대가 아주 가녀리게 붙어있다던 나의 두 발목, 걷거나 뛰면 아치가 무너지는 유연성 평발인 비루한 몸뚱이로 눈 앞에 놓인 비탈길을 내려가야 했다.


 작은 자갈들을 잘못 밟으면 바로 미끄러졌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선 온몸에 힘을 주고 걸어야 했다. 요령 있게 힘을 줄 땐 주고, 뺄 땐 빼며 걸어야 했지만 그런 방법 따윈 몰랐다. 온 길을 힘을 주고 내려가니 무릎 연골이 실시간으로 닳아가는 게 느껴졌다. 도가니가 내게 욕을 하고 있었다. 스틱을 본격적으로 사용해보려 했지만 도통 어떻게 힘을 분산시켜야 하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내리막과
내리막
그리고 솔직헌 나의 심정.mov


 한 번은 팔로 스틱을 버티다가 팔꿈치가 쪼개질뻔했고, 한 번은 걸음의 속도와 스틱을 꽂는 속도를 맞추지 못해 발과 스틱이 꼬여버리기도 했다. 양쪽 팔과 다리가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걷는 박자를 놓치면 스키를 타는 사람처럼 휘적거리며 희한하게 걷거나 장난감 병정처럼 한쪽 손과 발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몸만 더 아팠다. 배낭 안에 있는 침낭을 꺼내서 썰매 타듯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드디어, 수비리!


거의 남은 도가니가 없다고 느껴졌을때쯤에서야 산 밑으로 마을이 하나 보였다. 너덜너덜한 몸을 '옮긴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발을 끌며 어제 메일로 예약해놓은 수비리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런, 메일 확인을 못했단다. 이미 알베르게는 Full이었다.



완벽한 방전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 나서는데 직원이 나를 따라 나왔다. (세상 무너지는 표정을 짓긴 했었다.) 자신이 다른 알베르게 자리를 찾아주겠다며 동분서주했지만 가는 알베르게마다 자리가 없었다. 직원의 표정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나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하루 묵을 곳을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미 내 체력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움직일 수 있는 힘이 1%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친절한 직원은 무려 40분 정도 마을을 휘젓고 다니다 결국 숙소를 찾아냈다. 따라나선 내 멘탈은 나간지 오래였고, 발을 질질 끌며 걸은 탓에 아주 옹골찬 물집들이 생겨났다. 더군다나 등산화 속에서 물집을 피해보겠다고 비켜 디딘 곳들에도 물집이 생긴 것 같았다. 도리없이 고장난 기계처럼 아주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었는데,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 발에서부터 시작하는 모든 고통이 온몸에 흡수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샤워실에서 난 푹 퍼졌다. 물을 틀지도 않고 한참을 맨바닥에 눕다시피 앉아있었다. 배터리로 치자면 0%, 완벽한 방전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렇게만 쉬고 싶었는데



다시 술로 충전

 오늘 저녁은 바욘에서 만났던 수지와 웅민이와 함께 먹기로 했다. 그런데 장을 보고 오니 이미 판이 커져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니콜라와 니콜라의 친구들도 합류했다. 알베르게 주방에 일곱명이 모여있으니 아주 북적북적했다. 고기와 쿠스쿠스로 요기하려 했던 우리는, 니콜라를 만나 샐러드도 먹고 과일도 와인도 먹고 아주 호화로운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특히 비네거로만 맛을 낸 샐러드는 아직도 종종 생각날 정도로 맛있었다.


 거기다가 니콜라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온 와인을 나눠주었다. 술과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하나도 없다고 했다. 천사가 현현한것 같았다. 심지어 디저트도 만들어 주겠다고 소매를 걷었다. 바나나에 초코를 올린 디저트였다.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디저트를 챙기다니 정말 프랑스인다웠다.


 순례길을 걸은지 이튿날이라 다들 몸이 성한 곳이 없어 서로 앓는 소리를 하며 고단함을 나누며 산티아고 순례길의 이튿날이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와인은 약술이라고, 이내 소진된 기력도 다시 살아났다.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순례길


계속 불고 있는 쿠스쿠스와 정말 맛있었던 고기
니콜라가 만들어준 바나나 디저트
수비리의 저녁 풍경



매거진의 이전글 진짜 '술'례길의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