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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Sep 22. 2020

환상의 나라, 비어 랜드(Beer land)

산티아고'술'례길 3일차(1)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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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3일차
2018. 5. 16. 수요일
수비리(Zubiri) - 팜플로냐/이루냐(Pamplona) 20.3km


순례길의_흔한_아침_풍경.jpg


순례길의 아침

 산티아고의 아침에는 해야 하는 일들이 몇 개 있다. 먼저, 진동 알람이 울리자마자 얼른 알람을 끄는 것. 아직 자고 있는 사람들이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방을 나서는 것, 전날 널어놓은 빨래를 걷으러 가는 것, 날아간 빨래를 찾아다니는 것(가끔은 정말 멀리 있는 풀숲 더미에 있기도 한다) 이슬이 맺혀 사락거리는 풀밭과 새벽 냄새를 충분히 느끼며 다시 방으로 돌아오는 것.


 샤워실과 침대를 두 번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없게 최대한 모든 짐을 하나로 만들어 샤워를 하고 나오는 것, 무릎과 발목에 테이핑을 하거나 보호대를 하는 것. 바셀린을 손으로 듬뿍 퍼내 발 곳곳에 바르는 것, 발가락 양말과 등산 양말을 겹쳐 신고 부디 오늘은 물집이 생기지 않길 기도하는 것. 그리고는 재빠르게 침낭과 배낭을 싸고 등산화까지 질끈 동여매는 것. 마지막으로 배낭의 균형이 맞게끔 두 어번 배낭을 메고 뛰고 나면 아침 볕이 쏟아지는 길로 나설 준비가 끝난다.



하나 둘 모여드는 순례자들

 

 아침의 순례길은 아름답다. 밤새내 이슬이 간직하고 있던 숲 냄새는 햇빛이 닿는 곳마다 톡톡 터져 나온다. 도처에 풀 냄새, 나무 냄새가 가득하다. 짹짹거리는 새들과 가벼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넓게 트인 길과 아침 하늘, 습하지 않은 공기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킁킁거리며 걷는다. 사람들은 속속 알베르게에서 나와 어느새 한 길로 모이고 'Hola', 'Good morning', 'Buen Camino'하며 서로 인사를 나눈다. 활기찬 순례자들의 머리 위로 햇빛이 한 곳을 단정하게 비춘다. 오늘 나아가야 할 서쪽을 향해.


흔한_아침_풍경_2


환상의 나라, 비어 랜드(Beer land)를 찾아서

 길을 걷다 첫날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미할을 만났다. 발을 어색하게 옮기며 느적느적 걸어 나오는 폼이, 나처럼 발이 안녕하지 못한 것 같아 애잔했다. 미할은 자신과 함께 걸으면 빨리 걸을 수 없다고 우려했지만 내가 걷는 모습을 보더니 끄덕거리며 같이 걷자고 했다.


 미할은 'patience'를 배우기 위해 이 길을 걷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인내는, 지금 몸이 편찮으신 부모님을 향한 인내라고 했다. 자기가 발도 다리도 아프고 정말 힘들지만, 어떻게서든 이 길을 다 걷고 나면 부모님이 괜찮아질 것만 같다고 했다. 나도 덩달아 한 발 한 발에 미할과 미할의 부모님의 안녕을 빌며 걸었다.


이 파란 배낭 커버는 미할의 시그니처


 미할과 걸으며 정말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새삼 길 위에서 만난 이들에게는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보다 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미할은 정말 으마으마한 술쟁이였는데, 술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둘 다 눈을 빛내면서 여기서 먹는 술이 얼마나 맛있는지에 대해 줄줄 읊었다. 그러다가 문득 술이 고파졌다. 스윽 미할의 눈치를 보니 마찬가지였다. 우린 당장 나오는 바에 앉아서 얼른 맥주를 마시자며 바 하나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비어 랜드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미할은 발이 아파서 종종 멈춰 섰지만 비어 랜드가 약이라며(ㅋㅋㅋ) 힘을 내서 발걸음을 뗐다. 등산 스틱을 쥔 그의 손에서 비장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드디어 마을이 나왔다. (마을에는 보통 바가 있다) 정갈한 벽돌벽이 적당히 큰 마을의 느낌이라 위가 꾸룩꾸룩 움직이며 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지만 그곳은 바가 없었다. 풀이 확 꺾여버린 미할과 나는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여기 정말 바가 없냐고 몇 차례나 물어봤지만 정말 없었다. 우린 거의 우는 목소리로 맥주를 뜻하는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을 읊으며 걷기 시작했다. beer.....cerveza......cerveja.... biere...맥주....알콜...drink......여전히 바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화두는 좋아하는 술 이야기로 넘어갔다. 미할의 나라와 나의 나라에서 유명한 술과 맥주, 모든 와인들, 모히또와 마티니 등등 별별 술 이야기를 다 하다 손등에 가상의 소금을 뿌리고 데킬라를 uno, dos, tres 하며 먹는 시늉을 하는데 드디어 바가 보였다. 환상의 나라, Beer land에 도착한 것이다. 너무 벅찬 나머지 눈물이 차오를 뻔했다. 미할도 눈물을 훔치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여기가 바로 비어 랜드!


한낮의 맥주 파티

비어 랜드는 환상적이었다. 바 앞에는 테라스가 넓게 펼쳐져 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햇빛을 받으며 요기하고 있었다. 바 안에서 앉아서 보면 난간에 초록 페인트가 군데군데 덧칠해진 소담한 다리가 보였다. 다리 아래로는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평화로웠다. 가끔 첨벙거리며 개울에 발을 담그는 사람도 있었다. 바를 발견하는 사람마다 우리가 그랬듯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모두가 들렀다 가는 곳, 나른한 고양이가 꿈뻑꿈뻑 햇살에 잠이 드는 곳이 바로 비어 랜드였다.


푸짐한 오믈렛과 황금빛 맥주


 이렇게 좋은 곳은 먹어서 혼쭐을 내야지. 맥주가 나오자마자 짠- 건배한 후 모조리 원샷했다. 역시, 미할은 술 흐름을 아는 사람이었다. 한 병을 비우자마자 내가 본 가장 그의 빠른 걸음으로 카운터에 가 한 병을 더 시켰다. 한 병은 두 병이 되고, 두 병은 세 병이 되고 있었다. 광합성을 하면서 마시는 맥주가 이렇게 맛있다니. 머리는 볕 때문에 따뜻한데 속은 씨원한 이 상황이 미간을 찌푸릴 만큼 이렇게 좋다니. 맥주에서 느껴지는 곡식의 향기가 저 멀리 밀밭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내음과 섞여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데메테르(곡식의 신)는 정말 실존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게 아니라면 이런 맥주 맛이 날 리가 없다. 암. 한국에서도 안 믿던 다신(多神)을 여기에 와서야 이해하게 될 줄이야 몰랐다. (참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가톨릭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가톨릭 대성당까지 도달하는 길이다. 가톨릭은 유일신이다)


 여긴 흡사 만남의 광장이었다. 미할이 걸으면서 이야기하던 사람 중에 폴 아저씨가 있었는데, 건강이 아주 좋지 않은 할아버지라 산소 호흡기를 차고 주무시면서도 순례길을 걷는다고 하신 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만날 줄이야. 너무 반가워 함께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날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방을 함께 썼던 가족이 또 바(bar)로 들어왔다. 그런데 미할이랑 또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알고 보니 중국계 브라질인이었다. 눈물 나게 반가워 다 같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한 잔은 두 잔, 두 잔은 세 잔


 폴 아저씨가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다음 알베르게까지는 택시를 탄다는 말을 하자마자, 이미 퍼져버린 미할은 '나 안가!, 택시 탈 거야'하며 눌러앉아버렸다. 걷지 않겠냐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꿈쩍않았다. 와중에 브라질에서 온 가족도 택시를 탄다고 했다. 이미 시간은 점심시간이 지나있었다. 차양 그늘에 앉아 있어도 해가 이글거리는게 느껴졌다. 더웠다. 이 날씨에 걸었다간 땀으로 젖을게 뻔했다. 하지만 이틀만에 점프(순례길에서 이동수단을 타는 것)를 할 수는 없지. 택시를 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애써 도닥거리며 다시 길을 나섰다. 비어랜드 안녕. 미할도 폴 아저씨도, 브라질 가족도 나중에 만나요.


+ 미할은 배고프다고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오믈렛 하나와 맥주 몇 잔을 먹으며 배불러했다. 밥의 민족인 대한민국에서 온 나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어 랜드에 있던 내내 나른했던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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