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술'례길 3일차(2) : 레몬 맥주와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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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3일차
2018. 5. 16. 수요일
수비리(Zubiri) - 팜플로냐/이루냐(Pamplona) 20.3km
밀밭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비어 랜드에 너무 오래 머문 탓일까, 길은 이미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얇은 점퍼를 벗으니 살갗에 제법 따가운 햇살이 닿았다. 술기운은 포슬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몸의 밖에서는 태양이, 안에서는 술기운이 대차게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쾌한 기분이 올라올 틈이 없었다. ‘좀 더운데?’ 싶으면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더 이상 못 걷겠다, 힘들다 싶어도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서부터 ‘스스스스’ 소리가 났다. 바람이 밀밭의 소리를 데려오고 있었다. 밀밭은 여기저기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밀결’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이나 산 아래엔 밀밭이 드넓었다. 바람이 간질이는 곳마다 밀밭에는 결이 생겼다. 털이 고운 강아지를 쓰다듬을 때처럼, 닿는 곳마다 부드럽고 섬세한 흔적이 남았다. 오케스트라로 비유하자면 바람은 지휘자, 밀밭의 소리는 현악 파트와 닮아 있었다. 바람이 단숨에 밀밭을 지나가면 와스스와스스 소리가 쏟아지고, 부드러운 미풍이 불 때 밀밭은 고요하고도 경이롭게 너울졌다.
Buen Camino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은 'Buen Camino'하며 인사를 건넨다. 처음에는 지극히 명확한(Buen = 좋은, Camino=길) 이 인사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안녕(安寧)'의 의미와 작별의 의미가 공존하는 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은 많은 우연이 따르는 곳이다. 함께 야간 버스를 타고 생장으로 온 친구들,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친구들, 걸으며 친구가 된 이들을 등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길이다. 그런 만큼 순례자들은 종종 우연을 운명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스치는 친구들에게 '다음 바에서 만나' 혹은 '어디 마을 공립 알베르게에서 만나'하며 인사한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의 사정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몸이 좋지 않아 하루를 통으로 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속도를 내거나 늦출 수도 있다. 잠시 점심이나 먹으러 들른 마을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짐을 풀고 눌러앉을 수도 있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길에 질려 택시나 버스를 타고 몇 마을을 건너뛸 수도 있는 곳이다. 즉, 다시 만날 수 있던 친구를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모든 만남과 순간이 끔찍하게 소중하다.
레몬 맥주, 끌라라(Clara)와의 첫 만남
산티아고 여행기를 보다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술이 하나는 와인, 남은 하나는 레몬 맥주(클라라)다. 보통 과일 맥주나 소주는 향만 아주 미세하게 첨가된 이도 저도 아닌 맛일 거라 경험으로 예측하지 않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Radler'라고 쓰여있는 레몬 맥주들도 먹어본 적 있었지만 큰 인상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저 레몬 기분만 낸 느낌?
그런데 기대 없이 마신 레몬 맥주 한 모금에 눈이 번쩍 떠졌다. 맥주가 닿는 모든 곳에서 레몬향이 불꽃놀이처럼 펑펑 터지고 있었다. 구멍이라는 모든 구멍으로 레몬향이 치고 올라왔다. 마치 홍어를 먹었을 때처럼 모든 향이 신체의 말단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미친 맛이었다. 레몬향이 첨가된 게 아니라 진짜 레몬이 맥주에 담겨있었다. 달콤하고 상큼하고 시원하고 아주 다 했다.
달지도 않은데 달았다. 목마르지도 않았는데 목말랐다. 우리는 레몬 맥주를 링거처럼 목구멍에 꽂아 넣고는 생명수처럼 마셨다. 이렇게 맛있는 레몬 맥주님을 감히 경시하려 했다니 발바닥 물집 세 개가 생겨도 모자랄 터였다. 레몬 맥주의 위대함을 알려준 선지자들의 정에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모자랐던 우리는 결국 나가 레몬 맥주를 여러 병 사서 또 마셨다. 세상에나. 많이 먹었는데 물리지도 않았다. 이 닦기도 싫었다. 영원히 이 맛을 간직하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아침을 기다렸다.
빨리 내일이 와서 또 레몬 맥주 먹게.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 순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