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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Oct 09. 2020

레몬 맥주 처돌이들의 레몬 맥주 도장 깨기

산티아고'술'례길 4일차 - 모든 종류의 레몬 맥주를 먹고 말테야



아침은 든든하게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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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4일차
2018. 5. 17. 목요일
팜플로냐/이루냐(Pamplona) -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24.7km



모닝 맥주로 위장을 달구고

 까미노의 네 번째 날이 밝았다. 처음 만난 바는 지나칠 수 없지. 당장 배낭을 풀고 시원한 생맥주 하나를 주문했다. 오전 10시였는데도 사람들은 바로 몰려들어 금방 자리가 다 찼다. 이제 막 도착해 두리번거리는 순례자들에게, 먼저 앉아있던 이들은 원래 알고 지낸 사이였던 것처럼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슬쩍 자신의 테이블을 내어주었다. 여기저기서 간이 의자를 드르륵 끄는 소리가 즐비했다.


 내 테이블에 함께 앉은 이들은 아일랜드에서 온 커플, 클레어와 에디였다. 내 친한 친구 이름도 '클레어'라며 아일랜드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현지에서 마셨던 기네스 이야기를 했다고 하니 기뻐했다. 알고 보니 정말 기네스 맥주에 자부심이 있는 커플이었다. 나와 클레어는 쉴 새 없이 기네스 맥주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에디는 우리에 비해 조금 과묵했는데,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가끔 무심하게 기네스 맥주의 이론적인 설명을 한 마디씩 얹어주었다. 마치 기네스 맥주 공장 투어 가이드처럼 전문적인 이야기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물으니 실제로 여러 번 기네스 공장 투어를 했다고 했다. 찐이었다.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술 이야기에 신나 연거푸 맥주를 마시다 보니 맥주잔에 맺혔던 물방울들이 바짝 말라 있었다. 정말 이제는 출발을 할 때였다.


이 날은 용서의 언덕을 오른 날. 보는 것만큼 가파르지는 않았다.
염원이 주렁주렁 달린 표지판




다리 아래서 레몬 맥주를

 오늘 머물기로 한 푸엔테 라 레이나는 소담스러운 마을이었다. 마을에는 정말 아름다운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근처에 벤치도 있고 다리도 앉기에 널찍한 게 노상 맥주 마시기에 딱이었다. 다리 근처 디아(스페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슈퍼마켓)에서 레몬 맥주와 간식거리를 사다 들고 다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레몬 맥주캔을 하나 따서 마시는 데 극락이 따로 없었다. 어릴 때 하던 1000피스 퍼즐에서나 보던 목가적인 풍경은 눈 앞에 있지, 졸졸 물을 흐르고 새들은 지저귀지, 목구멍을 넘어가는 맥주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지.


 게다가 숙소에 도착해 막 샤워를 하고 나와 마시는 맥주였다. 스페인의 낮은 따사로운 볕으로 가득한데, 샤워를 막 마치고 나오면 몸의 물기들이 햇빛에 빠짝 말라간다. 마치 내가 빨랫줄에 널린 빨래인 것만 같다. 촉촉했던 머리는 금방 마르고 햇볕은 동그란 머리통을 후끈하게 데운다. 축 처져있던 머리카락이 하나 둘 가벼워진다. 솜털까지 바짝 말라 온몸이 보송해진 상태로 맥주를 들이켜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다. 기분도 좋은 데다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 여전히 낮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한 모금, 한 모에 더욱 짜릿해진다. 그래 역시 이렇게 맥주 먹는 맛에 걷는 거지 싶다.


봐도 봐도 예쁜 다리



레몬 맥주 처돌이들의 도장 깨기

 레몬 맥주에 진심인 우리는 디아(슈퍼마켓)에서 갖가지 레몬 맥주 여러 캔을 사 오기에 이르렀다. 끌라라(레몬 맥주)의 나라답게 레몬 맥주 종류도 많았다. 자주 먹었던 브랜드는 'AMSTEL' 맥주였는데 'Damm lemon'과 'Shandy', 그리고 디아의 PB 상품으로 보이는 또 다른 'Shandy' 레몬 맥주도 있었다.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카트에 레몬 맥주를 담아 넣고 양손 가득 끙끙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거리를 만들고 드디어 열린 레몬 맥주 시음회! 사실은 어떤 레몬 맥주가 더 맛있을까 뽑아보려고 천하제일 레몬맥주대회를 한 거였는데 우리의 픽은 당.모.레(당연히 모든 레몬맥주)였다. 하나 같이 다 맛있었다. 맥주가 넉넉하니 마음도 풍족해져 한 모금 한 모금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게 아주 큰 장점이었다. 이제부터 맥주는 쫌쫌따리 들고 오지 말고 짝으로 들고 오자고 약속했다. 평소 맥주는 배불러서 몇 잔 못마시는 편인데 이건 끝도 없이 들어갔다. 부대끼지도 않았다. 위대했다. 상큼한 레몬향과 술냄새가 한데 가득한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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