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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Oct 10. 2020

노란색 '화살표'를 믿으세요?

산티아고'술'례길 4일차 -  수많은 화살표와 함께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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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4일차
2018. 5. 17. 목요일
팜플로냐/이루냐(Pamplona) -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24.7km


언제나 볼 수 있는 노란 화살표


 산티아고 순례길은 명확한 길이다. 길 위에는 수많은 노란 화살표들이 방향을 일러주고 있다. 이 길이 맞나 싶을 때마다 어김없이 노란 화살표가 나온다. 건물 벽에, 표지석으로, 길 위에 페인트로, 그것도 아니라면 노란색 스프레이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대성당)를 향해있다. 덕분에 순례자들은 방황하지 않고 걸을 수 있다. 따로 지도를 보지 않더라도, 누구에게 묻지 않더라도 산티아고로 계속 향할 수 있다. (핸드폰 없이 걷는 순례자들을 종종 만날 수 있는 정도다.)  


 어찌 보면 쉬운 길이다. 화살표만을 의존해도 결국 도착점에 다다를 수 있는 길. 그렇지만 난 그 의지가 익숙하지 않았다. 화살표가 나오지 않으면 금세 불안해졌고 자주 멈춰 지도 앱으로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가끔은 화살표를 믿지 않기도 했다. 이 길이 정말 맞는 걸까, 혹시 이 길로 가면 돌아가는 건 아닐까 염려하며 더러 다른 방향으로 걸을 때도 있었다.


 

 이는 도시에서 살던 버릇이 가시지 않는 까닭이었다. 거의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나는 매번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자주 확인하려는 버릇이 있었다.


 도시의 길은 언제나 복잡했고 인식해야 할 정보가 넘쳐흘렀다. 도시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같은 듯 다른 듯 생긴 건물들을 내 눈과 머리에 입력해 놓는 편이 나았다. 간판에 쓰인 색색의 글자들은 언제나 읽어야 할 표지판이었다. 길을 걸을 땐 항상 지도 앱을 켜고 파란 동그라미로 표시되는 내 좌표와 길의 모습을 번갈아보며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그러니까 내게 길은 늘 살펴보고 기억해야만 하는, 목적지를 가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내게 건물이나 간판의 정보가 없는 길을 걷는 건 생경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핸드폰도 없이 길을 걷고 있는 한 순례자에게 물었다. 핸드폰 없이 길을 걸으면서 길을 잃을 염려를 하지 않느냐고. 그가 말했다.


 길은 놓여 있고 우리는 그저 놓여진 길을 걷는 거라고. 우리는 가려는 방향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길을 잃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방향을 잃은 거라고, 길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라고. 


 그의 말이 맞았다. 길은 길 그 자체였다. 기억하기 위해 애써야 할 대상도, 목적지를 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지 않았다.  


 

 그제야 노란 화살표가 내 눈에 어여삐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화살표의 방향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십 분마다 확인하던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넣고 지퍼를 잠가버렸다. 덕분에 자유로워진 손으로 스쳐가는 바람을 매만질 수 있었다. 자주 멈추지 않으니 걸음에는 탄력이 붙었다. 좀 더 가벼워진 걸음으로 길을 디뎠다. 화살표와 화살표의 사이에 있는 공백도 곧 익숙해졌다. 이내 난 자연스럽게 공백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바심이나 두려움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드디어 길이 품은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길을 걸을 땐 방향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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