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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Oct 25. 2020

술과 함께 걷는, 에스떼야 가는 길

산티아고'술'례길 5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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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5일차
2018. 5. 18. 금요일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 에스떼야(Estella) 22.9km



기억하세요, 레몬 맥주는 생(生)이 진리라는 걸

 오늘따라 아침부터 더웠다. 보통은 점심을 먹고 나온 후에야 헥헥거리는 편인데, 이미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굉장했다. 도저히는 못 걷겠다 싶었는데 수지도 마침 이 근처라고 했다. 둘 다 이가 시릴 정도의 시원한 맥주가 시급했다.



 막 들어간 바는 맥주 탭이 가득한 찐 맥주 맛집이었다. 탭에 쓰인 여러 브랜드들을 훑다 'limon' 글씨에서 시선이 멈췄다. 저건 KTX를 타고 가면서 봐도 레몬 맥주가 확실했다. 이게 레몬 맥주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세상에나. 여지껏 레몬 맥주를 캔이나 병맥주로는 봤어도 생맥주로는 처음이다.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걸 애써 삼키며 한 잔을 시키고는 모든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레몬 맥주를 영접했다. 그리고 꼴깍 - 한 입을 마시자마자 오늘도 부르짖었다. 오, 주(酒)님.


 한순간 온몸의 더위는 걷히고 온전한 평화만이 남았다. 여름날의 탄산음료 광고가 목구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찌푸려진 인상은 펴질 틈이 없었다. 그만큼 맛있다는 이야기였다. 수지와 나는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존맛'을 외치곤 했는데, 톡톡 터지는 탄산 하나까지 느끼는 와중이라 존맛의 'ㅈ'도 말하지 못했다. 그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끝도 없이 주억거릴 뿐이었다. 여행자들이 사막에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 마시는 물이 이러할까. 지금까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먹은 술 중 단연코 최고였다.



마트 진열대에 술이 가득하면 내 맘도 가득해져요

  에스떼야는 지금껏 지나왔던 곳들보다는 큰 도시였다. 보통은 아주 조그마하거나 약간 큰 슈퍼 정도 있는 편인데, 여긴 정말 큰 마트가 있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이마트나 홈플러스쯤? 오랜만에 도시와 자본의 짜릿한 정취가 느껴졌다. 원하는 건 모두 살 수 있는 듯한 그런 느낌.


 없는 게 없는 보물창고 같은 그 마트에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술 코너였다. 코너를 도는 순간 절로 탄성이 나왔다. 술 코너의 크기가 한국에 비견되지 않았다. 보통 한국 마트에서 술 코너는 마트 한편에 따로 마련해 놓은 게 전부인데, 한국에서라면 과자나 생활 용품이 들어차 있는 진열대 몇 개를 술로 가득 채워놓았다. 심지어 한 진열대는 와인으로 꽉 차있었다. 처음 보는 맥주도, 술도 많았다. 이것도 저것도 맛있어 보여 고르다 보니 카트는 술로 가득 찼다. 잠에 들기 전 마셔야 할 술들이 이렇게 많다니. 행복해졌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장을 보고 나서 에스떼야(Estella)에 왔으니 에스텔라(Estrella)를 마셔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전혀 무관한 둘이었다. 분명 발음이 다른 둘이지만, 스페인어로 더블 엘(ll)의 발음은 'y'에 가까워 그 에스떼야가 에스텔라겠거니 착각한 거다. 에스떼야의 철자에서 'r'은 없었다. 그러니까, 별맥주의 고장이 에스떼야는 아닌거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아무튼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그때는 당연히 도착하자마자 에스텔라 맥주를 먹겠다고 호언장담한 날이었다. 하지만 왠지 에스텔라 생맥주를 파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몇 군데를 전전하다 찬 찾은 가게에서 드디어 에스텔라 생맥주를 맛봤다. 한국에서 먹는 생맥주는 정말 맛있다!하는 맥주가 많지는 않은 편인데 여긴 정말 마시는 모든 맥주가 맛있었다. 하긴, 본고장에서 먹는 맥주라고 생각했으니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튀김 요리로 간단히 요기를 하며 TV에서 하는 투우 경기를 조금 보다 다시 알베르게로 향했다. 아직 우리에겐 먹을 술이 많이 남아있었다.



다시 만난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카 부부

 마트에서 사 온 술을 마시러 알베르게의 공용 주방으로 내려가니 저번에 뵈었던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카 부부가 계셨다. 부부는 내가 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 가톨릭 신자기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적인 목적과 연관 있어 보이지만, 생각보다 ‘순례’를 목적으로 걷는 사람들이 다수는 아니다.)


 매번 웃는 얼굴로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게 인사해주시고, 잠깐 이야기를 나눠도 긍정적인 느낌이 가득한 두 분이었다. 두 분의 웃는 모습이 꼭 닮아있는 데다 매번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사실 순례길 등지에서 함께 걷는 부부와 연인들을 꽤 만날 수 있는데, 싸우거나 각자 걷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을 정도로 싸움이 잦은 곳이다. 그런데도 언제나 항상 두 분은 온화하게 웃으며 서로를 챙기며 걸으셨다.


 가장 멋있었던 점은 순례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순례자 여권에 찍어주기 위해 도장을 한국에서 직접 만들어오셨다는 것이다. 도장은 큰 배낭과 등산 스틱을 들고 있는 부부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종종 순례길을 걷다가 외국인들이 '도장을 직접 만들어온 그 한국인 부부'를 아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인상 깊은 일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천천히 걷는다고 하셔서 다시 볼 수는 없겠구나 싶었는데 여기서 마주치다니 정말 반가웠다. 술을 넉넉히 사와 오히려 다행이었다. 함께 나눠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 순례길


정말 귀여운 부부의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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