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까미노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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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5일차
2018. 5. 18. 금요일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 에스떼야(Estella) 22.9km
까미노를 걷기 전에는 걷고 나서 남은 모든 시간을 유의미하게 쓸 수 있을지 알았다. 평소 일상에서 못했던 여러 가지의 것들, 예를 들면 갤러리에 쌓여 있는 캡처 정리나, 사진 정리, 저장해놓은 많은 글들 읽기, 책 읽고 일기 쓰기, 생각하기 등을 모두 여유롭게 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까미노를 걸을수록 하루는 단출해지는데 시간은 더 빠듯해지기 시작했다.
걸을 때는 걷는 데 집중하느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금방 물집이 났다. 한 걸음을 제대로 걷고 있는지, 내 발이나 가방이 닿는 부분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계속해서 살펴야 했다. 1~2시간 정도 걸으면 번거롭더라도 양말을 벗어 발을 바짝 말렸다. 얼마큼 걸어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도 중요했다. 몸의 에너지와 갈증의 정도, 남아 있는 물의 양과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의 거리도 체크해야 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타이밍을 보려면 온몸이 느슨한 듯 기민해져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을 하고 나면 더 정신이 없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오늘 입은 옷을 빠는 것이다. 몸이 퍼지지 않았을 때 빨래를 해놓지 않으면 동력을 영영 잃고 만다. 저번에는 타이밍을 한 번 놓쳤다가 30분 동안 빨래 더미를 바라보고만 있었던 적도 있었다. 또 도착하자마자 빨래를 해야만 볕이 좋을 때 말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날 배낭에 주렁주렁 빨래를 옷핀으로 꽂아 걸으며 말려야 한다. 혹여 비라도 온다면 미처 마르지 않은 빨래가 배낭 속에서 쿰쿰해진다. 그러니 지체없이 움직여야 했다.
얼른 빨래를 하고, 샤워까지 모두 마친 후에는 저녁거리와 (술과) 아침거리를 장봐야 한다. 500ml 생수조차 2kg 아령같이 느껴지는 이 길에서 미리 장을 본다는 건 사치다. 매일 많지도, 적지도 않은 만큼을 사서 와야 한다. 장을 보고 왔다면 저녁을 만들어야 하고, 먹은 걸 또 정리해야만 한다. 그리고 간단한 과자 같은 안주만 남겨두고 다시 또 한 잔 두 잔 곁들이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다. 방에 들어가기 전, 새벽 내 비가 올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비가 온다면 다시 빨래를 걷으러 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찍 잠에 든 순례자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내일 아침 한 번에 짐을 쌀 수 있게끔 샤워 용품과 옷을 한 곳에 챙겨놓으면 하루가 끝난다.
사실은 참 단순한 것들이다. 마음만 먹으면 후딱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것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원래 있던 곳에서는 ‘할 일 1’정도 치부하며 의미 없이 지나쳤던 일들. 그렇기에 시간이 드는 이유는 당연했다. 하루의 군데군데에 멈춰 충분한 품을 들였던 경험이 내겐 없었다.
천명관 님의 소설 <고래>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까미노의 하루를 정의하기에 완벽한 구절이라 생각했다. 하루를 완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순간을 잃지 않아야 한다. 순간을 잃지 않으려면 부단히 민첩해져야 한다. 느리더라도 하루의 구석구석을 면밀히 살피고 가닿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매번 충분한 시간을 들여 온전하게 지나치는 것, 귀찮더라도 오늘의 먼지는 오늘 닦아내는 수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하루들을 가벼이 여기고 살았는지 깨달았다.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하루를 완전하게 살아내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