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려 걸어요, 산티아고 ‘술’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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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6일차
2018. 5. 19. 토요일
에스떼야(Estella)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21,4km
어제부터 오늘을 기대해왔었다. 오늘은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는 루트다. 이라체 수도원은 바로 순례자들에게 무한 와인과 물을 제공해주는 곳이다. 걷기 전부터 가장 기대되는 곳이었다. 이렇게 혜자로운 수도원이라니! 와인을 마구마구 주는 수도원이라니!
늦으면 와인을 못받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일찍 눈이 번쩍 떠졌다. 걸음도 가벼웠다. 걷는 내내 저 지평선 끝에 와인이 아른거렸다. 평소 아침마다 미적거리며 걷는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드디어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수도원 근처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이미 수도원 바깥에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산티아고를 걷는 중 이렇게 붐비는 곳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바도 이만큼은 아니었는데) 유쾌한 웃음이 군데군데에서 터졌다. 다들 술 앞에서 한 마음 한 뜻을 하고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났다. 위에서 꾸룩꾸룩 소리가 났다. 위도 와인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보지 못할 친구들이 보였다. 술쟁이 미할과 브라질 친구들이었다. 항상 느지막히 일어나 느리게 걷고, 낮이면 바에 퍼져 있다가 움직이는 친구들인데 아홉시도 안된 이 시간에 여기에 있었다. 이미 친구들은 와인을 얼큰하게 마셔 두 볼이 빨갰다. 그리고 신기한 잔을 들고 샴페인 마시듯 와인을 마시고 있어 자세히 보니 플라스틱 생수병을 반을 칼로 잘라내고 뚜껑을 닫은 채로 간이 와인잔을 만든거였다. 세상 여유롭게 내게 ‘Cheers’라고 말하며 유유히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남들은 얼른 페트병에 와인을 받고 걸을 채비를 하는데, 미할과 친구들은 움직일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 한껏 취할 작정임에 틀림없었다.
이라체 수도원에는 와인과 물 급수대가 각각 있는데, 와인 펌프와는 다르게 물 급수대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 와인을 받기 위해 마시고 있던 음료수나 물병을 헹궈내려 오는게 전부였다. 모두가 와인 급수대 앞에 서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인데도 다들 반짝거리는 눈으로 행복하게 자기의 차례를 기다렸다.
나도 얼른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지금을 위해 페트병을 두 개나 가져왔다. 500ml 물병 하나도 무거워하는 나로서는 거대한 결심이었다. 수도원에 도착하기 전에 물도 콸콸 다 마셨다. 두 병을 담아가고 말테다, 내 차례가 가까워질때마다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드디어 내차례! 처음엔 와인 정수기쯤으로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펌프식에 가까웠다. 레버를 위 아래로 움직이면 와인이 콸콸 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고, 내 뒤로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두 통을 받으려 했건만 무리였고, 한 병으로도 이미 행복했다.
500ml 생수통에 와인이 가득 담겼다. 오늘은 더 행복하게 걸을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