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밍 Jun 13. 2021

여기는 순례길인가 술례길인가

순례길의 목적 상실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이전 글 : #19 처음 만나는 도시, 로그로뇨 https://brunch.co.kr/@2smming/91


산티아고 순례길 7일 차
2018. 5. 20. 일요일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로그로뇨(Logroño) 28.6km



*이 날 정말 술만 먹고 다녀서 술 이야기만 꾸준합니다(ㅠㅠ)


놀라지마세요, 점심도 먹기 전이지만 세 번째 맥주

충분히 쉬고 걸어선지 로그로뇨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사실 도착하자마자의 꼴은 정말 별로다. 흙먼지 가득 묻은 등산화에 땀에 절은 모자와 옷때문에 늘 찝찝하다. 보통은 어떻게든 배고픔을 이겨내고 씻고 나올 생각이 가득하지만 로그로뇨는 달랐다.


타파스의 도시답게 로그로뇨에는 타파스 바가 줄지어 있었다. 이렇게나 타파스 바가 많은데, 심지어 여기저기 사람들이 맥주 한 잔씩 하고 있는데! 테라스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유명한 버거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지만, 몸이 찝찝해 죽을 것 같지만 여기서 한 잔이라도 못먹으면 너무 억울했다. 이 햇빛, 온도와 습도가 모두 빨리 생맥주를 목에 꽂아 넣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선 정말 딱, 딱 한 잔만 먹는 걸로.


보이는 아무 바에서, 정말 딱 한 잔


짐풀고 먹는 네 번째 술

샤워를 하고 나와 당장 오늘 갈 맛집, 버거 하임으로 향했다. 구글 지도 별점이 정말이었는지 점심시간이 지난 애매한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약 3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곧 어마어마한 크기의 햄버거가 나왔다.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크기에 두꺼운 패티, 녹아 흐르는 치즈에 고소한 냄새까지.


여기에 맥주를 안먹으면 유죄 중 유죄지. 레몬 맥주는 어쩜 먹어도 먹어도 그렇게 달고, 배가 불러도 그렇게 맛있었다. 벌써부터 이 맥주를 못먹을 한국에서의 삶이 고달파졌다. 있는동안 분에 넘치게 많이 마시고 가야지. 내 하루를 가득가득 술로 채워야지.


버거집에서 레몬 맥주 한 잔!(이라 쓰고 두 병)


밥을 다 먹고, 적당히 오른 술 기운으로 돌아다니니 내 눈에 누가 행복 필터를 씌워 놓은 것 같았다. 순례길 중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도시 모습에 자주 감동했고, 젤라또 가게에서 먹은 젤라또도 맛있어서 감격. 라면을 살 수 있는 중국인 마트가 있는 것도 감격. 갑자기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도, 저녁에 할 타파스 바 투어도 너무 좋았다.


귀여운 벽화


무려 다섯 번째 술을 마시고 있었던, 로그로뇨 타파스 바 투어

고대하던 저녁이 오고 드디어 타파스 바 투어를 하러 나섰다. 타파스 바는 간단한 안주류와 술을 파는 곳인데, 각 가게마다 잘하는 요리가 다르다. 서너개의 타파스 바를 가려고 계획을 세웠고, 가장 처음가려고 하는 곳은 bar angel. 양송이를 구운 타파스가 유명한 곳이다.


거리는 벌써 시끌시끌했다. 술집들은 모두 창문과 문을 활짝 열고 있었고, 노란빛이 가득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요리를 하는 소리도 가득했다. 가게 앞에는 사람들이 와인 잔과 작은 타파스를 들고 모여있었다. 한 걸음 걸으면 고기 냄새가 훅 끼쳐왔고, 다시 한 걸음 걸으면 야채를 볶는 냄새가 술술 났다. 여기저기서 와인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Bar angle에서는 모두가 양송이 타파스를 먹고 있었다. 글라스 와인도 함께 파는데 메뉴가 생각보다 단촐해서 선택이 오히려 더 쉬웠다. 가게 안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가게 안에도, 밖에도, 가게 옆에도 모두가 양송이 타파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사람 구경에 와인 한 잔을 비우고, 다시 와인을 시키니 드디어 요리가 나왔다. 양송이를 한입에 먹자마자 육즙이 팡 터지면서 버섯향이 확 올라왔다. 특별한 소스를 뿌린 것도 아닌데 평소에 먹던 양송이와는 달랐다. 고기 같은 느낌도 있고 향도 풍부한 느낌. 짭조름한 소스가 분명 소금 하나 맛으로 낸 맛은 아닐텐데, 간단하게 휘리릭 볶아 나온 양송이 맛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었다.


함께 나온 와인도 완벽했다. 가볍지만 묵직하고, 양송이 맛을 가릴만큼 향기롭진 않지만 분명 꿀향이 은은하게 배어있었다. 청량감이 있으면서도 물처럼 부드럽게 넘어가는 괜찮은 와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메뉴판에 있는 다른 와인도 더 먹어보고, 영원히 눌러 앉고 싶었지만 도장깨기 할 다른 타파스 가게들이 아직 많았다.


Bar angel의 양송이 타파스


그 다음부터는 거의 가게 10분 컷이었다. 들어온 지 10분도 되지 않아 와인을 비우고, 다시 또 다른 가게로, 또 안주와 와인을 순삭하고 또 다른 가게로 향했다. 이 타파스 거리에 있는 모든 가게가 사랑스러워 배만 허락한다면 여기에 계속 남고 싶었다. 노란 빛이 일렁이며 흘러나오는 거리는 한껏 따뜻했다. 낯선 언어들이 와인잔 표면을 타고 둥그렇게 흘렀다. 사람들을 구경하려 몸을 돌리면 마주치는 눈이 정겨웠다. 저녁 시간의 여유를 즐기는 현지인과 여행자들의 설렘과 행복이 모두 함께하는 거리였다. 눈을 마주할 때마다 한 잔, 두 잔 함께 잔을 드는 마법같은 곳이었다.


여기는 양꼬치 타파스 바!





1리터 샹그리아는 너무 작잖아요, 6차

아직 하나가 더 남았다. 로그로뇨에서의 마지막 6차, 바로 샹그리아다. 최소 1일 1샹그리아를 하던 수지와 웅민이, 나는 먹다먹다 못해 샹그리아를 직접 만들기에 나섰다. 식당에서 파는 1리터짜리 샹그리아는 몇 개를 시켜도 노나먹으면 금방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다. 와인과 샹그리아용 와인을 사고, 과일을 엄청나게 사서는 가득가득 채워넣었더니 약 2리터 짜리 페트병으로 두 개가 나왔다. 내가 만들지는 않았지만(거의 웅민이가 다 만듬) 보기만해도 마음이 찌르르한게 자식 같았다. 마음으로 낳은 자식, 샹그리아 두 병.


직접 만든 샹그리아는 맛도 좋았다. 파는 샹그리아가 아니니 재료도 듬뿍 들어가 과일향도 진했다. 따로 설탕을 넣지 않았는데도 달큰한 맛이 올라오고, 적당히 깔끔하게 마무리 되어 물리지도 않았다. 직접 담근 거라고 생각하니 더 뿌듯하고 행복하게 한 잔씩 비울 수 있었다. 나는 여기서 하룻밤을 더 보낼 예정이라, 어쩌면 함께 보내는 섭섭한 마지막 밤을 달래는 술로 더없이 좋았다. 


다음편에 계속

여긴, 목적을 잃은 것 같지만 그래도 산티아고 순례길








매거진의 이전글 처음 만나는 도시, 로그로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