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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7일차
2018. 5. 20. 일요일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로그로뇨(Logroño) 28.6km
갑자기 찾아온 고요
선글라스가 없어졌다. 지금은 7일 차, 산티아고까지는 적어도 23~25일이 더 남은 시점이다. 날이 갈수록 점점 강렬해지는 햇빛을 맨눈으로 받아낼 생각을 하니 아찔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30km 정도를 걸어야 하는 날이라 어서 서둘러야 했다.
평소보다 일찍 나선 길은 고요가 짙게 깔려있었는데, 갑자기 정적이 빈틈없이 들어찬 길이 커다란 경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실 '경' 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여기에 나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먼저 겁났고, 그다음으로는 꿉꿉하게 내려앉은 공기와 적막이 나를 덮칠 것 같은 무서움이었다.
그때, 마르지 않은 진흙에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유일하게 균열을 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흙탕물이 튀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위안이 되는 마음에 더 찰박거리며 걸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막 길을 출발한 다른 순례자들의 발소리도 마음을 달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는 뜨고 하늘은 말갛게 개어 있었다.
처음 만나는 도시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 중 처음으로 도시를 만나는 날이다. 지금까지 오며 가며 만난 사람들도 첫 도시, 로그로뇨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아주 거대했다. 등산 스틱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거나 등산화가 발에 맞지 않아 새로 사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고, 평소 도시에서만 살아와 모든 게 느린 여기가 버거운 이들에게는 숨 쉴 구멍이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웍(Wok)'이라는 중국식 뷔페(심지어 초밥도 있는)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대할 만한 도시였다.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따로 있었다. 먼저 로그로뇨에서는 공립/시립 알베르게가 아닌 사립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했다는 것과 로그로뇨의 명물이 타파스 바라는 사실. 그리고 잠시 걷는 걸 멈추고 다음날 빌바오 미술관을 다녀올 계획이라 처음으로 걸을 걱정 없이 술을 맘껏 마실 수 있을 행복한 미래를 기대했다. 펍 크롤(Pub Crawl : 여러 술집을 차례차례 다니며 술을 마시기)처럼 타파스 바를 순례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싹 돌았다. 최대한 빨리 도착해서 최대한 많은 술집을 가리라. 걸음에도 속도를 붙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머무를 수 있는 알베르게의 종류는 공립/시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로 나뉜다. 공립/시립 알베르게의 경우 대부분 도착 선착순으로 운영되며 가격이 굉장히 저렴해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다. 시설은 비슷한 가격이라도 천차만별이다. 사설 알베르게의 경우 공립 알베르게 보다 많은 금액을 지출해야 하지만 시설의 질이 나은 경우가 많다. 또한 공립/시립 알베르게의 경우 체크아웃 시간이 굉장히 이른 편이고, 연박 여부에 있어서도 엄격하지만(보통 1박, 아플 경우에는 늘려주기도 한다고) 사립 알베르게는 넉넉한 체크아웃 시간에 무제한 연박이 가능하다.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사실 제 아침은요
빨리 걷는다고 걸었는데 한 시간 반을 넘게 꼬박 걸어서야 그다음 마을이자, 어제 다시 돌아왔던 산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제 택시로는 10분이 조금 넘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마을 한가운데는 슈퍼 같은 느낌의 바가 하나 있었는데 지나는 길목에 있어 아주 만남의 광장이었다. 저번에 만난 조셉도, 엘리자벳도 베트남 가족도 만났다.
오늘 아침을 시키고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니 두 명이서 먹는 아침이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와서 말하건데, 내 아침은 과한 게 맞았다. 흔히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 간소한 끼니를 먹는다고 생각하는데 대개는 그렇다. 저녁에 장본 식량으로 아침과 점심을 해결하고, 저녁은 직접 알베르게에서 해 먹는 순례자들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하루 전체 식비를 10유로로 잡거나 하루 전체 예산을 10유로로 잡기도 한다.
이런 길에서 내 아침 식사 비용은 이례적이긴 했다. 아침만 10유로 정도였기 때문이다. 보통 간단한 아침(샌드위치 등) + 물 + 음료수(종종 오렌지 착즙 주스) + 카페 콘레체(라떼) + 맥주를 함께 먹고, 가끔은 이 구성에 술 한두 잔이 추가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챙겨 먹지도 않는 아침인데 여기서는 하나 둘 추가되다 보니 이 지경에 다다랐다.
그리고 빈속에 술을 한두 잔 들이켜면 몸 안쪽부터 뜨끈-해지는 게 기부니가 정말 좋잖아요^^?
다가온 여름, 낮맥은 진리
확실히 여름이 오고 있었다. 날이 좋다 못해 너무 더웠다. 보통 아침에 반팔 - 얇은 바람막이 - 경량 패딩 - 바람막이를 껴입고 출발하는데 오늘은 얇은 바람막이를 벗었는데도 더워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바는 보이지 않았다. 물병에 물도 다 떨어진 지 오래고, 입은 바짝 말랐다. 바로 그때, 오아시스 같은 푸드트럭을 발견했다. 갑자기 힘이 났다. 뽀빠이 같은 힘이.
어느 정도였냐면 배낭을 메고 거의 뛰다시피 했다. 여태까지는 도가니 걱정에 절대 시도 조차 하지 않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가니가 대수려나, 텁텁한 내 목을 뚫어줄 시원한 맥주가 더 급했다.
사자마자 맥주캔을 탕- 따고 치이이익 올라오는 거품 하나 흘리지 않게 얼른 입으로 가져다 댔다. 맥주 광고에서처럼 꿀꺽꿀꺽 헐레벌떡 마시니 단전에서부터 캬- 소리가 절로 났다. 햇볕이 맥주의 시원함을 뺏어갈라 얼른 한 캔을 다 마시고는 넓적한 돌 벤치에 기대앉아 쉬는데 좋은 기분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얼굴에도 열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정오 즈음의 진한 햇빛이 돌 벤치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솟아나던 기분이 햇빛에 살짝 녹아 내 얼굴에 달라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크림 브륄레의 가장 겉표면의 설탕 막처럼 내 기분도 햇빛에 코팅되는 느낌. 낮맥은 역시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