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럼프에 빠져 어쩔 줄 모르겠을 때
잘해보고자 마음먹은 일이 인정받지 못할 때 얼마나 마음이 시릴까요?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 속 키키는 자신의 비행 능력을 활용해 의뢰인들의 마음을 전달해주는 일을 막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마녀들 사이의 관습에 따른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일도 아닌, 독립 후 스스로 찾아낸 정체성이기에 키키는 이 배달에 대한 애착이 아주 컸습니다.
일이 마음에 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준다는 믿음 때문이었어요. 배달을 의뢰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감사를 표해주고 기뻐해 주었거든요.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럴 수는 없겠지요. 어느 날은 궂은 날씨에 비바람을 뚫고 어렵게 날아왔건만, 선물을 전달받는 내내 불평만 늘어놓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맙니다. 원치 않는 선물을 받았다는 게 이유였어요.
처음 겪는 이 난감한 상황에 키키는 꽤나 당황합니다. 처음으로 자기 일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죠. 자신의 쓸모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됐을 거예요. 상처를 입은 겁니다. 정체성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하죠.
# 슬.럼.프
전부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엔 시선이 다른 방향들로 기울기도 하지요. 자신의 의무나 사명이라 철저히 믿었던 행동에 대한 초점이 흐려지는 순간입니다. 마음에 의심이 들어차면, 의욕은 새어나가죠. 그때에 우리가 의욕을 상실하듯 키키는 마법을 상실합니다. 찰나였지만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동경하는 마음이 일자 더 이상 날 수 없게 되었어요. 슬럼프였습니다. 마법이 없는 마법사라니. 키키는 지금 생에 최대 난관에 갇힌 셈입니다.
우리도 키키와 마찬가지로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지요. 하고자 하는 일의 의미가 훼손될 때, 처음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 때,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도통 보람을 느끼지 못할 때, 어느 순간 몸 안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와르르.
이때 우리는 큰 난제를 떠안은 데 대한 속상함을 추스를 새도 없이 당장 멈추어 있다는 불안감, 또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자신을 더욱 옥죄고는 합니다. 스스로 돌보아야 하는 때에 오히려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는 경우가 많아요. 발을 굴러야만 나아갈 수 있음이 자명한데 어떠한 힘도 남아있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떡해야 할까요.
# 발버둥 그리고 숨 고르기
다행히도 키키의 곁엔 그녀의 상실감과 답답함에 공감해주는 우르슬라가 있어 주었습니다.
마법이나 그림이나 비슷하구나. 나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때가 자주 있어.
- 정말? 그럴 땐 어떻게 해?
그럴 때는 발버둥치는 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려대!
- 그런데 여전히 안 되면?
그리는 걸 관두지. 산책을 하거나 경치를 구경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아무것도 안 해.
우르슬라가 당연하단 듯 가볍게 툭 던진 말이 키키에게 또 우리에게 묵직하고 따뜻한 말로 안착합니다. 그녀의 말이 맞아요. 일단은 계속해나가는 수밖에요.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다면 잠시 쉬어가는 수밖에요.
‘그리는 걸 관두지. 아무것도 안 해.’ 이 한마디가 경직되어 있던 사고와 마음에 불을 지펴줍니다. ‘잠시 내려놓아도 되는구나. 그래도 그 일이 나를 떠나진 않겠구나.’란 생각으로 이끌어준 한 마디였어요. 조바심을 거두고 잠시 숨을 몰아쉬게끔 도와준 ‘안도’였습니다.
# 시그널
문득 슬럼프란 이유 있는 신호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분명 축적된 경험에 대한 결과이며 마음의 자상일 거라고. 억누르기만 해서는 절대 해소되지 않을 문제인 거라고.
내면의 여러 충돌로 인해 갈라진 틈을 채우는 게 아니라 표면만 덮어 때우다 보면 그 틈은 심연에서부터 차차 벌어지게 될 거예요. 언젠가 아주 약간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큰 구렁으로 자라고 말겠죠. 그리고 어느 날엔가 크고 널찍한 도로에 싱크홀이 툭- 꺼지듯, 모든 의지와 희망이 단번에 푹- 꺼져버리고 말 거예요.
틈이 벌어진 순간을 잘 알아채고 자신을 돌봄으로써 그 틈새를 잘 채워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시간의 틈이 없다는 이유로 미룰 게 아니라 시간으로 꾹꾹 메워야 할 틈인 거죠.
# 그러는 사이에도 불씨는 꺼지지 않아
도무지 남아있는 힘이 없어서, 달리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쉬어갈 수밖에 없는 시간 안에 있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테죠. 그럼에도 역시 지금껏 쥐고 있던 일이 꼭 해야만 하는 일임을. 혹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임을. 반대로 이제 더는 할 수 없겠단 마음으로 귀결된다면, 행로의 방향을 틀 전환점이 되어줄 테니 그 또한 다행일 테고요.
과연 키키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다행히도 마법을 되찾게 되는데요. 그게 언제냐 하면 소중한 사람을 구해야 한단 절실함이 일 때였습니다. 친구인 톰보가 비행기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 ‘반드시 구해야 한다. 꼭 성공해야 한다.’라는 간절함으로 비행을 시도하는 데요. 마침내 그 순간 마법이 되살아나죠.
키키의 입장에선 비행의 의미가 전달에서 구원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움츠러들었던 자아가 다시 꿈틀. 전보다 더 성장한 모습으로 깨어나는 순간이었어요. 사고가 생중계되고 있는 상황, 그때에 톰보를 구조해냄은 마을 전체의 바람을 이뤄준 것과 같았습니다. 즉, 톰보를 구한 것은 마을 전체를 구원한 셈이었죠.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해야 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될 때, 다시 한번 그 절실함을 깨닫게 될 때, 잠시 희미해졌던 어느 소행의 가치는 이전에 스스로 부여했던 것보다 한층 더 짙어집니다. 나를 이루는 정체성이 한 겹 더 두터워지는 순간, 슬럼프는 그렇게 극복되는 것 같아요. 이 반가운 상황을 우리는 ‘성장’이란 단어로 치환할 수도 있겠죠.
# 크고 작은 슬럼프가 반복되더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영화 속 여담을 좀 더 이야기하자면, 우르슬라도 자신이 꽉 막힌 벽을 만난 적이 있음을 키키에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힘든 시기를 겪고 난 뒤, 그리는 일이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조금 더 잘 알게 됐다고 해요.
그림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깨달았다는 이야기였어요.
키키는 그 과정이 괴로웠냐고 물어요. 그러자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 답합니다. 아무리 좋아하거나 의미 있는 일을 한다 한들 종종 찾아오는 괴로움을 피해 갈 순 없다는 뜻이었죠. 허락된 능력이 있다는 것, 부단히 애착이 가는 일이 있다는 건 매우 감사한 일이지만, 또 그 때문에 감수해야 할 고통 또한 당연히 주어질 수밖에 없겠죠. 그건 어쩌면 할 수 있는 무언가 있음에 대한, 살 수 있게 하는 무언가 있음에 대한 대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이 곧 ‘나’를 이루는 일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해내고야 맙니다.
매번 크고 작은 슬럼프를 거칠 때마다,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일임을 재차 깨달을 때마다, 그 일과 나 사이는 한 뼘씩 더 두터워집니다. 엄밀히 말해 나와 나의 사이가 두터워집니다. 안고 있는 일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 한 꼭 해야만 하는 일, 그래야만 살아지는 일은 반드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간혹 쉼표를 찍어가며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제나 그렇듯 극복하는 순간은 오고 말고요.
「마녀 배달부 키키」의 감독이자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거장인 마야자키 하아오 님조차 창작 과정 안에서 수없이 벽을 마주했다고 말합니다. 그때마다 그의 돌파구도 역시 ‘그럼에도 놓지 않는 것’이었죠. 해결책이라면 단연 꾸준함뿐이었습니다. 그의 수많은 천재적 발상, 수십 년 간 작품 활동의 비결, 감히 견주기 힘든 엄청난 결실들의 비밀이 그의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나는 매일 5mm라도 전진하고 싶다.’
결국 해낼 수밖에 없는 일이 있어요. 그래야만 숨이 쉬어지는 일. 그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나를 살게 하는 일.
당신에게도 그러한 일이 있는지요. 끝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일. 오늘 당신이 안고 있는 그 일을 한 번 더 꼭 안아주고 토닥여주면 어떨까요. 지금껏 고마웠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언제까지나 함께 잘해보자고.
- 출처 -
º이번에 기댔던 작품│미야자키 하야오, 「마녀 배달부 키키」, 2007
ºPhoto by @leohoh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