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 Aug 26. 2022

입가에 잔뜩 묻혔더라도

- 주변의 위로마저도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Photo by @hippofromearth on Unsplash


  혹시 이런 고민을 해보신 적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이 울고 있을 때, 당장이라도 가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따라도 될지, 아니면 한 발치 물러나 그만의 시간을 지켜주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요.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힘들어하는 대학 동기를 마주했을 때, 꿈의 문턱에서 또 한 번 좌절한 동생을 마주했을 때, 당신은 그들에게 어떠한 말로 위로를, 아니 어떠한 방법으로 힘을 전하곤 하시나요?  

        

 얼마 전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봤습니다. 극 중 은정은 청춘의 한가운데서 감당하기 힘든 상실을 마주하게 되는데요. 극진히 사랑했던 연인이 암 투병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은정은 이 불운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연인을 떠나보낸 지 1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그와 종종 대화를 나누곤 하죠. 마치 같은 시공간에 함께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맞습니다, 환시였어요. 이는 닥친 현실을 인정하기 힘들 때 나타나는 정신 질환의 증상이라고 해요. 즉, 괴로운 현실을 견디지 못한 은정의 마음에 병이 생긴 거지요. 그녀의 아픔을 옆에서 지켜보는 친구들의 마음도 아주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은정의 슬픔을 섣불리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은정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은정이 떠난 연인과 대화하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가 무척 안쓰러웠지만, 그 행동을 제지하려 든다면 은정은 그대로 무너져 버릴 거란 걱정이 더 컸기 때문이었을 테죠.        


 친구들은 은정에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리라 여겼습니다. 그녀들끼리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결심하죠. 은정이 스스로 아픔을 터놓을 때까지 아무 말 않고 묵묵히 기다리기로. 

 당장 너의 아픔을 헤아리듯 행동하거나 너의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보단, 은정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해 주는 것이 훨씬 더 힘이 되리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대신에 그들은 늘 은정의 곁을 지켜줍니다. 은정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그녀의 공허함을 채워주어요. 그들이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지만, 사실 ‘곁에 있어준다는 것’ 그만한 위로와 온기가 또 있을까요? 열혈 시청자의 입장에선 은정의 곁에 이런 친구들이 있어준다는 사실 덕에 그나마 마음을 쓸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동안에도 그들은 친구란 명분을 내세우며 은정에게 성급히 손을 뻗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픔을 모른 체하고 그 아픔과 함께 동생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은정의 옆에서 오로지 침묵으로 힘을 전하죠.

     


 

 어느 사이엔가 은정은 자신의 아픔을 헤쳐나가야 할 필요를 스스로 절감하게 됩니다. 마침내 병원 상담을 받아보기로 결심하는데요 그녀로선 엄청난 내딛음이었죠. 은정이 그 위대한 한 걸음을 뗄 수 있던 건, 비단 그녀만의 의지는 아니었을 거예요. 그 모든 과정엔 은정의 친구들이 침묵으로 던져왔던 묵언의 응원들이 곳곳에 서려있고, 은정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 퇴적층처럼 쌓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은정은 분명 알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들이 자신을 기다려주었단 사실을요. 그 마음이 얼마다 든든하고 또 감사했을까요. * 침묵할 수 있는 사이, 침묵을 지켜도 관계가 지켜지는 사이. 그를 통해서도 위로를 전하고 받을 수 있는 사이. 이런 관계를 유지할 이들이 몇 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은 벅차게 푸근해집니다.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다짐한 은정은, 비로소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간 매 순간 꺼내고 싶었지만, 그러고 나면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것 같아 할 수 없던 말을 내뱉습니다.        

  

‘안아줘. 힘들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은정이 친구들에게 하루빨리 도움을 청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못내 참아왔던 은정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됐습니다. 저 또한 주변에게 나의 안위를 불쑥 고백하기를 꺼려 하는 편이어서요. 혹시 당신도 그런 편이신가요?      


 이를테면, 감정이란 종종 모순적이어서, 위로받고 싶음과 동시에 들키기도 싫은 힘듦이 있죠. 더 많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많이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일수록, 그럴수록 더 내보이고 싶지 않은 종류의 슬픔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으로 뛰어들게 되는 그런 종류의 아픔이.   

  

 그렇게 홀로 뛰어든 안갯속은 조금도 푹신하거나 포근하지 않지만, 오직 그 안에서만 참았던 숨들을 몰아쉬고, 한껏 움츠렸다 널브러짐을 반복하며 조금이나마 감정을 추스를 수 있게 되죠. 그건 그곳이 어떠한 시선도 없는 공간, 마음껏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그런 공간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만큼 치밀하지 못해서 고통을 감추는 데에 매우 어설프죠. 마치 입가에 잔뜩 묻힌 채로, ‘초콜릿을 먹지 않았다’며 시치미를 떼는 아이처럼. 때문에, 그들은 분명 눈치챘을 거예요. ‘저 친구가 어떤 아픔을 감추려 애쓰고 있구나.’라 생각했을 거예요.          


잘 압니다. 그들은 내가 애써 감추려는 모습을, 애써 모르는 척해 주었던 것임을. 

그래서 그들에게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들 덕에 다시, 또 일어섭니다.        

  

때론, 모른 채도 위로가 되어요. 때론, 그것이 가장 힘이 됩니다.          



◐ 연재 시리즈:  <작품에 기대어 내일을 기대해> 중



- 출처 -


º이번에 기댔던 작품│드라마: 이병헌, 「멜로가 체질」, 2019

ºPhoto by @hippofromearth on Unsplash



이전 05화 다독이며 쓸어줌으로. 나와 나의 동행을 바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