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기대어 내일을 기대해> 중
우리는 사랑에 있어 어떤 방식을 취하고 있을까요?
명확히 진단할 순 없겠지만 분명 나름대로 정해둔 룰도 틀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 방식들을 형태로 치환해본다면,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겠죠. 왜냐하면 그 생김새란 개인의 성향뿐 아니라, 경험에 의한 감정들이 빚어낸 현상일 테니까. 그중에서도 어떤 아픔을 통과했을 때, 사랑의 모양도 크게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곤 그대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죠. 자신이 믿는 방식을 취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감수할 수 있는 틀 안에서,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취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마음 어딘가 움츠려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에 상처가 나면 몸이 웅크러지듯 말이에요.
이를테면, 누군가는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방법으로. 누군가는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다니기도 할 겁니다. 또 힘듦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관계의 끝맺음을 보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사랑이 깊어지는 게 두려워 그 마음을 스스로 가두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 외의 모습들로도 우리는 처한 상황, 느끼는 감정에 솔직히 마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거고요. 마주하기 꺼리는 지점들은 되도록 들춰보지 않으려 하고, 직접 만들어낸 프레임 안에 자신을 가두어 스스로 속이는 방법을 택하곤 합니다.
다만, 사랑과 충돌했을 때 그 틀은 깨어지기도 하나 봅니다. 굳어짐의 점도가 높을수록, 그에 걸 맞는 온도로 가열돼야겠지만. 어쨌거나 그 순간을 맞이하면, 어떤 기운이 나를 끄집어내 준단 느낌이 들지요.
소설 <프리즘>을 읽었습니다. 각기 다른 네 명이 가진 사랑의 모양을 보여주어요. 좀 전에 예로 든 사랑의 형태들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사연이었습니다. 소설은 네 명의 등장인물이 각각의 사랑들로 얽혀 한 시절을 공유하다가 다시 각기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리는데, 읽고 나면 마음이 꽤나 아립니다. 한데 모였다가 각자의 방향을 찾아 흩어지는 결말이라니. 그래서 제목이 프리즘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동시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던 건, 그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단 믿음 때문이었는데요.
또다시 예를 들면, 사랑에 대한 기대가 다시 피어나게 되기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누군가를 계속 만나야만 했다면, 그런 회피를 멈추고 본인의 쓸쓸함에 직면해보게 되기도. 관계의 끝맺음이 늘 어설펐다면, 확실한 작별을 시도하는 방법으로. 사랑이 다가올 때 자신을 가두기만 해왔다면, 이제는 마음을 따라보는 것으로.
프리즘을 거친 빛이 화려한 색을 빚으며 뻗어 나아가듯, 그들 각자도 사랑을 거치며 빛을 머금은 채 나아갑니다. 성장일 테죠.
이렇듯 사랑은 특별한 힘을 가지나 봅니다. 이전의 나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힘. ‘빛’은 광선을 흡수하고 반사하며 나타나는 현상이라죠. 어쩌면 사랑을 깊이 흡수했을 때도 나타나는 현상이지 않을까요? 늘 조바심 들고 때론 한없이 초라해지게 하는 사랑이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은 빛이 납니다.
작가님은 ‘기회’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좋아할 기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도 기회가 될 수 있다면, 그 기회란 이런 게 아닐까요. 자신을 제대로 마주할 기회. 자신에게 가장 솔직할 기회.
- 출처 -
º이번에 기댔던 작품│손원평, 은행나무, 「프리즘」, 2020
ºPhoto by @jontyso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