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삶 한 켠에 작은 숲을 들이고 싶은 당신께.
서점의 적막함이 저를 끌어당기는 날이 있어요. 유독 속이 시끄럽던 하루를 보낸 날이면, 집에 가는 길에 잠깐 서점에 들릅니다. 실은 책을 구매할 목적보다는 잠시 휴게할 요량으로요. 마치 얇은 막을 두른 것처럼 외부로부터 차단된 서점 특유의 공간감을 느끼다 보면요, 그리고 모든 것이 잘 정돈된 매장 안에 있다 보면요. 마음이 한껏 차분해지고, 복잡했던 머릿속도 정돈되는 기분이 좋아서요.
그러다 최근엔 저의 재미난 행동 패턴을 발견하게 됐어요. 어김없이 서점에 들르게 된 날, 제 마음이 한껏 황량해져 있는 상태라면, 제 두 발이 유독 한 서가 앞을 서성이더라고요. 그 서가는 바로 에세이 시리즈 <아무튼, 00>의 진열 칸이었어요. ‘아무튼’ 시리즈는 책마다 새로운 저자의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몇 년째 독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고, 벌써 사십여 편의 이야기를 엮어냈죠. 시리즈는 아무튼 하루키, 서핑, 망원동, 아침드라마 등 다양하고 재기발랄한 소재를 거쳐 온 가운데, 한 줄기 공통주제를 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시리즈 소개 글을 그대로 옮겨볼게요.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아무튼'은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이 책들을 구경했던 이유는요. 각자의 분야에서 형 형색으로 빛나는 분들께서, 자신만의 어떠한 방법으로 삶을 지탱하고 계시는지 궁금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분들은 어떤 것에 관심을 쏟는지, 어떤 즐거움에 기대어 어떠한 힘을 얻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론 그들의 ‘아무튼'을 엿보며, 저만의 ‘아무튼’ 또한 찾고 싶단 마음도 있었고요. 이번에야말로 한 권 정도 읽어보자 생각했고, 그렇게 고르게 된 책이 임이랑 님의 「아무튼, 식물」이었어요.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이면서도 낯설지만은 않은 주제가 제겐 ‘식물’이었거든요.
관심이 가던 새 분야의 이야기를 읽는 건, 역시 재밌더라고요. 작가님은 현재 정원에 거주하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집에 들인 화분의 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열이 됨을 지나… 이제는 그 수를 정확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식물들과 동고동락하고 계시거든요. 그리고 책 안에는 작가님께서 집에 화분 하나를 들이게 된 사건을 시작으로, 식물 돌보는 일이 삶의 일부로 자릴 굳히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동시에 그와 함께 쌓여온 재미난 일화들을 들려주시죠.
그 시간 동안 작가님께 찾아온 한 가지 변화는 재밌었고, 다른 한 가지 변화는 사실 좀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작가님께서 새로이 갖게 된 ‘태도’는 마음에 아주 크게 와닿았는데요. 먼저, 작가님께 찾아온 두 가지 변화부터 이야기해 볼게요.
# 두 가지 변화
우선 무언가를 진정 좋아하게 되면, 생활방식이 바뀌더군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과 다르지 않더라고요. 작가님의 본업은 뮤지션입니다. 작업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기에, 해가 지면 일어나고 해가 뜨면 잠자리에 드는 삶을 10년도 넘게 해오셨다고 합니다. 새벽의 적막함과 호젓함이 좋기도 해서 이 생활패턴이 적성이라 여겨오셨다 해요.
그런데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그 패턴이 변화를 맞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식물들이 깨어있는 시간에 그들과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 활발히 숨을 쉬고, 이파리를 활짝 열어 광합성을 한다 해요. 그리고 해가 지면 숨죽여 잠을 청할 시간이기에, 이왕이면 낮에 물마시기를 좋아하죠. 우리가 밤늦게 식사를 하자마자 잠을 청하면, 잘 소화시키지 못해서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과 같은 이유로요.
이를 감안하면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해요. 그 시간 동안 물을 주고, 창을 열어 공기도 순환시켜주어야 하니까요. 그녀는 자신도 신기해하며 고백합니다. ‘그동안 아무도 바꾸지 못했던 나의 패턴을 식물 친구들이 바꿔놓았다.’
무언가 진실로 좋아하게 되면, ‘기꺼이’란 음도 함께 자라나 봅니다.
작가님께 찾아온 또 한 가지 변화는 ‘새로운 눈’을 하나 더 가지게 된 건데요. 그녀가 처음 식물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특정 식물들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고 해요. 사실, 식물 자체에 대한 애정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어느덧 그 미학적 기준은 흐려졌고, 대신에 모든 식물이 자라는 과정에 대한 경이로움과 위대함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식물이 싹을 틔우고, 새순이 돋아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해서 지켜보다 보면, 그 과정 자체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더군요. 그 과정을 봐오며 ‘모든 씨앗에는 의지가 있고, 모든 이파리에는 이유가 있구나.’라며 감탄하셨대요.
이제는 길을 걷다가도 식물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하세요. 그 경이로움을 마주할 때마다, 당연히 즐거움은 늘어갔죠. 그녀는 경쾌한 어조로 이야기합니다. ‘세상 모든 것에서 식물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마치 이제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눈을 하나 더 가지게 된 것만 같다.’
# 한 가지 태도
마지막으로, 제게 또 특별하게 와 닿았던 부분은 작가님의 어느 마음가짐이었어요. 어느 한 가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더라고요. 작가님의 경우엔 ‘계속해내고 싶은 마음’이었죠.
좋아하는 활동이라면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습니다. 성과와는 상관없이 행위 자체로 한껏 즐거울 수 있으니까요. 또한 당장에 기댈 활동이 있다는 건, 내일에 대한 기대 또한 갖게 해줄 테니, 이는 큰 축복이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 덕에 삶이 좋아지기도 할 테니까요.
진심으로 마음 쏟는 활동 하나쯤 있는 것. 이 자체로 성공한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언가를 계속해내고 싶은 마음은 곧,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되어줄 테니까요. 이를테면 이렇게요.
'쉽게 자라는 것과 아무리 공을 들여도 자라지 않는 것들이 뒤섞인 매일을 살아간다. (중략) 이번 생은 한 번뿐이고 나의 결정들이 모여서 내 삶의 모양이 갖춰질 테다. 그러나 자라나지 않는 것들도 계속해서 키울 것이다. 거대하게 자라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내 삶 속에 나와 함께 존재하면 된다. (중략)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고단하고 행복한 매일이다.'
- 임이랑, 「아무튼, 식물」 중
이 문장을 읽고는 크게 감화돼서 잠시 책을 덮고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어요. 제가 쥐고 있는 일들이 마음처럼 자라지 않아 속을 끓곤 하던 찰나에, 그 답답한 마음을 어루만져준 글이었거든요. 위 문장은 저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하려는 일에 공을 들이지만, 도통 나아가지 못한 하루였더라도 속상해하지 마. 간혹 잘 풀려가지 않더라도 그런데도 지속하고 싶은 마음 하나라면, 그 자체로 행복한 매일이야,’
한편, 어떤 형태의 애정이라도, 설령 일방적으로 돌보고 쏟아야 하는 애정이라도 틀림없이 상호보완적이란 믿음이 자라납니다. 그 애정은 어떤 식으로든 나를 채우고 변화시킬 테니까요. 그렇기에 무어든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일에 결코 소모나 낭비는 없는 것 같아요. 또한 무어든 사랑하는 일은, 실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영향이 결국 ‘나’를 향할 테니까요.
혹시 당신도 자주 기대는 활동이 있으신지요. 당신의 ‘아무튼’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바라건대 그 ‘아무튼’을 잘 지켜내셔서, 그대의 하루들을 잘 지켜내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더 즐겁게 계속 써보겠습니다.
- 출처 -
º이번에 기댔던 작품│임이랑, 코난북스, 「아무튼, 식물」, 2019
ºPhoto by @insungyoon on Unplash
ºPhoto by 영화, 「리틀 포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