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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un 22. 2022

나만 뒤처진 기분에 조금 괴롭습니다.

  <작품에 기대어 내일을 기대해> 중


Photo by @bmaguire530 on Unsplash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신지요. 어느 작품을 우연히 본 후, 그로 인한 여운을 더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동일 작가나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된 경험 말이에요. 제게는 정유정 작가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왕가위 감독의 작품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임이랑 작가의 「아무튼, 식물」을 읽으면서였어요. 마침 기쁘게도 식물 이야기가 담긴 작가님의 또 다른 책이 있더라고요. 제목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던 그 책은 바로 「조금 괴로운 당신께 식물을 추천합니다」입니다. 저자가 이 책 안에선 또 식물과 우리의 삶을 어떻게 연결 짓고, 어떤 방법으로 삶을 다독여줄지 아주 궁금해졌어요. 기대를 안고 책을 펼쳤고, 그 안에 폭 안겨 있다가 나왔습니다.


 여러 에피소드 중, 속도에 관한 이야기에 특히 오래 머물렀는데요. 책이 건네준 응원을 되도록 오래 곱씹고 싶어서였던 것 같아요. 혹시라도 요즘 걸음이 더뎌져 조금 괴로우시다면 이 이야기를 추천합니다.      




1.


 작가님께선 여러 식물을 함께 돌보시는 데요. 그러다 보면 말이죠. 같은 시기에 씨앗을 심더라도, 싹을 틔우고 몸을 키우고 꽃을 피우는 속도는 모두 제각각이라고 합니다. 개중에는 자라고 있는 건지 걱정이 될 정도로 아주 느릿느릿 자라나는 아이도 있다고 해요.


 예컨대, 블랙티트리가 그렇다더군요. 문득 식물의 생김새가 궁금해서 블로그를 검색해 봤습니다. 아주 얇고 길쭉한 나무줄기 끝엔 작고 뾰족한 잎사귀들이 풍성하더라고요. 공중에서 잎사귀들이 사방으로 뾰족뾰족 돋아나 있으니, 꼭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는 모양 같았습니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엔 이런 당부가 있었어요. ‘만일 이 식물을 파종(씨앗을 심어 키우는 일) 하고자 한다면, 씨앗을 준비하기 전에 아주 느긋한 마음부터 준비하시길 추천드려요!’




 작가님께서 뿌린 씨앗 중에도 블랙티트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블로거의 우려는 그녀의 텃밭에서 현실이 되었어요. 아침저녁으로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꽃씨는 미동이 없었거든요. 다른 식물들이 쑥쑥 자라 제법 모양을 갖춰갈 때에도, 겨우 이파리 하나를 올리기 시작했대요. 


 그리고 신기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저는 일조량과 기우 조건이 잘 맞으면, 식물이 제 속도에 맞게 꾸준히 자라나는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식물도 필요에 따라 스스로 생장을 멈추곤 한다 해요. 날씨나 계절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죠.     


 ‘가드닝을 하다 보니 식물들이 가끔 멈춰 서기도 하더군요. 대단한 이유 없이 모든 것에 시들해진 식물은 때론 몇 달씩 미동도 하지 않아요. 지금보다 식물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의 나는 ‘얼음’하고 멈춰 있는 식물에게 커다란 변화나 풍부한 햇빛 같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테라스에 내놓아 직광을 받도록 해주고, 비료를 콸콸 부어주기도 하고, 물을 더 열심히 주기도 했지요. 
 걱정하는 마음이 차올라 저질렀던 그 모든 일은, 실수였습니다. 잠시 생장을 멈췄던 식물은 갑자기 과해진 물과 해를 견디지 못해 픽픽 쓰러졌어요.’  

 - 임이랑, 「조금 괴로운 당신께 식물을 추천합니다」중




2.


 식물을 길러보진 않았지만, 저자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어요. 나를 키워내는 일에도 종종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곤 하니까요. 나의 속도를 미처 인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란 여간 쉽지 않잖아요? 저 또한 계속 발을 동동거리며 엄한 행동들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곤 했습니다. 속도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무엇을 더 채워야 할지 끊임없이 탐색하곤 했어요. 그렇지만, 정작 무엇이 정말 필요하고 그렇지 않은 줄 모른 채, 몸만 바삐 움직인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가령, 필요치도 않은 강의를 굳이 수강한다거나, 대세라는 자기계발이라면 무턱대고 따라 해보는 식으로, 계속 무언가를 더하며 조급한 마음을 메우려 했습니다. 


 사실 이런 과부하가 성장을 더 늦출 뿐인데, 저는 자주 조급해하는 데 온 힘을 소진하곤 했어요. 엄한데 힘을 전부 쏟으니, 어느 순간 견디지 못하고 픽픽 쓰러질 수밖에요. 그래서 정작 뻗어가야 할 때,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날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제 두 발이 묶일 때면, 유독 주변 모두가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그들이 성큼성큼 나아가는 걸 보며, 나의 가치를 의심하고 심지어는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실수를 꽤나 자주 했어요. (사실 요즘도 마찬가지고요.) 




3.  


 그런 때일수록 내면을 살피지 못할지언정, 주변에만 온 신경을 쓰다가 자책에 빠지다니요. 뒤늦게야 나에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각자 걷는 길의 모양이 달라서 생기는 차이일 뿐인데 말이죠. 개인마다 구간마다 뻗어가는 속도가 다른 것뿐이고요. 스르륵 나아가지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좀처럼 그렇지 못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는 건데 말입니다. 게다가 분명 정체할 수밖에 없는 시간도 있는 거고요. 만일 정말 혹독한 시기를 막 지나 보낸 후라면, 무얼 더 하기보단 무엇도 하지 않을 때, 겨우 살아지는 날들도 있을 수밖에요.     

 한편, 식물이 휴지기를 원할 때가 있음을 알아차린 저자는 행동을 달리하기로 합니다.

 ‘식물의 멈춤에는 이유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만, 그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넘치게 주는 것이 제일 위험해요. 이제는 식물이 조용히 멈추거나 시들해졌을 때 그 속도에 맞춰 물과 햇빛도 줄여줍니다. 그들도 잠시 정적을 보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멈춰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게, 잠깐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식물을 위한 길입니다. 휴식기를 맛있게 잘 보낸 식물은 반드시 다시 깨어나 이파리에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예쁘게 자라줄 테니까요.’

 - 임이랑, 「조금 괴로운 당신께 식물을 추천합니다」



4.  


 나를 키워내는 일도 마찬가지라 깨닫게 됩니다. 현재 마주한 상황, 그에 따른 내 속도와 위치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느껴요.    

 

 이를테면, 문득 나의 노력에 의심이 들 땐, 속도에 안달하며 스스로 몰아세울 게 아니라 단지 임계점에 다다르지 못했을 뿐임을 잊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오늘 나아가야 할 방향에 집중할 것도요.

 또한, 혼자 뒤처지는 기분이 들 땐, 저마다의 사정과 그에 따른 속도가 있을 뿐이란 사실을 재빨리 상기할 것도 다짐합니다. 무엇보다 타자와 나의 위치를 비교하기보단, 어제보다 오늘 더 걸어온 나의 수고를 알아주자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간혹 어쩔 수 없이 멈춰야만 할 땐, 그래도 괜찮단 걸 반복해서 되뇝니다. 지금 잠시 멈추어 섰다면, 이 또한 곧 다시 도약하기 위함인 거라고.     


 물론, 그럼에도 정말이지 빨리 성장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주변의 상황이 어떻든 나의 걸음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나의 여정을 존중하고 차분하게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해 나아가기만 하기보다, 최선을 다해 나를 지켜내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루빨리 열매가 달리길 바라기만 하는 나무보단, 꾸준히 뿌리를 내리는 데 힘을 쏟을 줄 아는 나무에 더 건강하고 풍성한 열매들이 열릴 테니까요. 


나무를 사랑하는 과학자, 호프 자런은 저서 <랩걸>에서 이렇게 썼다죠.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 호프 자런, <랩걸>    

 


P.s 

이는 여담인데요, 블랙티트리는 잎사귀를 쓸어주면 달콤한 향기가 난다고 해요. 보살핌 받는 기분이 좋아서 향기를 뿜어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수고했을 당신의 어깨도 한 번 쓸어주시면 어떨까요?



◐ 연재 시리즈:   <작품에 기대어 내일을 기대해> 중



-출처 -


º이번에 기댔던 작품│임이랑, 바다출판사,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2020

º참고자료│호프 자런, 알마, 「랩 걸」, 2017

ºPhoto by @bmaguire530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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