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이제껏 걸어온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요. 답답하네요.
“바쁘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돼?”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대사입니다. 한 방 맞은 기분이었어요. 재하가 혜원에게 던진 이 말이 제게도 날아와 꽂혔거든요.
‘재하 말이 맞다. 가장 중요한 일을 외면하고 그때그때 열심히 사는 척 고민을 얼버무리고 있는 거 말이다.’
영화를 봤을 당시, 제 상황도 혜원과 다를 바 없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면해야 할 곳을 직시하지 못함에서 생기는 불안을 다른 애먼 일들에 힘을 쏟음으로써 해소하려는 아둔한 사람이 바로 저였거든요. 제 일상이 늘 숨찼던 건, 바빠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단 걸 깨달았어요. 바빠서 고민을 미룬 것이 아니라, 고민을 회피하고자 몸을 바쁘게 만들고 있다는걸. 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혜원을 제삼자 입장으로 보니 곧 저의 처지와 문제가 고스란히 보였습니다. 혜원에게 더욱 이입되기도 했고요.
영화는 고시 준비에 지친 혜원이 마음의 허기가 심해져 고향으로 피신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이 대학 진학으로 서울로 상경할 시점에 모친(남편의 부재에도 딸을 거뜬히 키워내신) 또한 당신만의 시간을 펼치고자 여정을 나섰기에 반겨줄 이 하나 없는 집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금방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기에.
그런데 막상 지내보니 겨울 한 절기만 머물기엔 좀 억울하다며 좀 더 오래 머물기로 냉큼 결심해버리죠. 나름의 안식년을 가지며 작은 것들에 즐거움과 감사함을 느끼는 혜원은 안정감을 되찾아가는 듯 보였지만, 사실 혜원의 마음속은 복잡했습니다. 애써 덮어두어도 자라만 나는 고민 때문에요. 그리고 그 고민을 수면 밖으로 꺼내준 게 재하였던 거죠.
영화는 혜원이 고향에 머무는 동안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자각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한 발 내딛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냅니다. 이미 힐링 영화로 워낙 유명한 작품이지만, 제겐 그를 넘어 큰 동기부여가 돼주었던 작품, 또 그를 넘어 성장영화로 다가왔던 작품이에요.
혜원이 잠시 고향으로 내려온 이유가 휴식이었다면, 사계절을 다 보내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턴 사실 도피에 가까웠죠. 무엇이 그녀를 그리 지치게 했던 걸까요? 서울살이가 혜원에게 유독 힘들었던 이유는 공시 준비에 대한 스트레스이기도 했겠지만, 그 목표에 대한 뜻이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줄곧, 대학에 가면 고향을 떠날 것이라 말해왔던 그녀에게 대학 진학과 공시 준비는 도시 생활에 대한 명분 정도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고요. 당시엔 따분했던 고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앞섰던 거라고요.
사실 갓 성인이 된 시점에 하나의 뚜렷한 뜻을 품는다는 건, 쉬운 일도 흔한 일도 아니죠. 이 시기엔 이곳저곳 씨를 뿌려보고 어디서 싹이 돋는지, 내게 맞는 토양은 어디인지 찾아가는 때이기도 하고요. 여기저기 부딪히고 헤매며 나아갈 방향을 잡아가는 그런 시기. 우리 모두 그 과정을 겪었거나 겪고 있듯, 혜원 역시 그 가운데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겪다 보면,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재하가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귀농이란 답을 찾았던 것처럼.
‘재하는 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여전히 코찔찔이 어린 애일 줄 알았던 재하가 혜원의 눈에 어딘가 늠름해 보입니다. 한 편으론 부럽기도 했죠. 이는 어엿한 성인이 된 재하의 겉모습 때문도, 재하가 농사일을 함에 대한 부러움도 아닙니다. 그가 그만의 답을 찾았단 사실, 더는 흔들리지 않고 어떤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늠름해 보였을 거예요. 답이 확실한 사람의 눈엔 빛이 그득하지요. 혜원은 그 눈빛이 부러웠을 거예요.
“이거(사과) 너 주려고 찜해둔 건데 그 태풍에도 안 떨어지고 끄떡없더라. 너랑 다르게.”
혜원은 자신만의 길 찾기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느낍니다. 동시에 이제껏 이해가지 않던 엄마의 이별 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재하가 답을 갖고 돌아왔듯, 당신 또한 자신의 답을 펼치기 위해 떠난 것이리라. 어릴 적 자신과 여러 요리의 맛을 보며 행복을 느꼈던 것처럼, 세상의 또 다른 맛을 보고자 여행을 시작한 것이리라.
‘이제 엄마도 이곳을 떠나서 아빠와의 결혼으로 포기했던 일들을 다시 해보고 싶어. 실패할 수도 있고, 또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지만, 엄마는 이제 이 대문을 걸어 나가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 갈 거야.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고 엄마가 늘 말했었지? 지금이 바로 그때인 거 같아. 잘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의 출발선에 서있다고 생각하자.’
‘그동안 엄마에게는 자연과 요리,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이 그만의 작은 숲이었다.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
재하는 행동으로 답을 펼쳤고, 혜원의 엄마는 기다림으로 답을 품었어요. 어린 딸을 소중히 품었던 것처럼 말이죠.
혜원도 이제 내면의 고민에 직면하리라 마음먹습니다. 오래 묵은 불안은 오래된 벽보와 같아서 좀처럼 떼어지지 않죠. 그래서 더욱 서둘러 떼어내려는 게 아니라 차라리 외면해버리는 방법을 택해왔었는데, 이제금 그 벽보를 떼어낼 의지가 생긴 겁니다. 혜원은 이제야 저대로 허기가 달래지는 기분이 들었을 거예요. 배가 뜨거워지는 기분, 몸 안에서 기를 못 펴던 의욕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곧바로 행동에 나서요. 황량했던 마음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내면의 씨앗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이 무얼 지, 어떤 것에 몰두하는 하루가 만족스러울지 찾기 위해서. 그러나 결코 당장에 판단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죠.
해서 혜원은 다시 서울로 상경합니다. 이는 그곳의 생활에서 뜻을 찾기 위함이 될 수도, 그곳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함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녀가 어떤 답을 내릴지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어떤 답을 어떤 때에 내리든 그녀를 응원할 것이기에. 또한 그녀가 내딛기 시작한 발걸음 자체로 큰 힘을 전해 받았기에.
아마 혜원이 돌파 중인 고민이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겁니다. 우리가 품고 있거나 품게 될 고민들처럼 말이죠. 어떤 고뇌에 휩싸인다는 건 분명 힘든 일이에요. 수많은 의심과 불안의 소음들 가운데 오롯이 혼자 놓이게 되는데, 그 어둠을 오로지 혼자 힘으로 떨쳐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 질문들을 모두 열어젖힌 뒤 맞게 될 아침은 그만의 좁은 세상에 몸을 구겨 넣었던 달팽이가 켜는 기지개만큼이나 상쾌할 거라 생각해요.
물론, 고민을 안게 되는 건 미숙한 선원이 키를 잡는 일과 같아서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짓는 적기이며 새 희망의 집을 짓는 처음입니다. 쉽게 건너뛸 수 있는 도랑 같은 것이 아니죠.
간혹 청춘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부딪혀보라는 강요를 받기도 하며, 혹은 청춘이라는 징표로 신중하기를 간과하는 거만한 실수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방향키가 존재 않는 배에 추진력은 아무런 쓸모가 없더라고요.
발돋움 전 혜원의 도피를 보며 정곡을 찔렸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었던 건, 그녀의 서울 살이와 고향에서 보낸 1년이 소모적 낭비로만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시 준비가 녹록지 않았겠으나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자리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고, 고향에서 보낸 1년 또한 비록 도피로 시작했으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외면했던 문제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돼주었죠. 꽤나 돌아온 것 같지만, 끝끝내 돌파구를 찾은 혜원을 보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혜원은 분명 자신의 답을 찾아내리란 확신 덕분에요.
안고 있는 고민을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숙고한 뒤 결단하더라도, 그 결단이 늦어지더라도, 또 그 결단이 불가피하게 번복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일 테니까요. 온갖 불안과 바람을 감내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꾸준히 성장하고 단단해질 테니까요. 게다가 헤맴이란 헤엄 끝에 비로소 찾아낸 자리라면, 더욱 꿋꿋이 지키려 할 테지요.
혜원이, 당신이, 그리고 제가 스스로 활짝 꽃피울 저마다의 숲에 당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안부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P.s
극중 재하에 따르면, 양파 농사는 모종 심기에서 시작된다고 해요. ‘양파는 모종 심기에서 시작된다. 가을에 씨를 뿌려두었다가 발로 잘 밟고, 건초와 비를 피해 멍석을 열흘 정도 덮어두었다가 싹이 나면 걷는다. 싹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키워서 미리 거름을 준 밭에 옮겨 심는데, 이것이 아주심기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이다.’
시간을 돌고 돌며 어느 정도 자란 뒤에야 제 자리에 안착한 양파는, 오히려 돌아온 시간 덕에 겨울 서릿발에도 뿌리가 들떠 말라죽을 일이 없다고 해요. 게다가 온몸으로 겨울을 견뎌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고 하네요.
- 출처 -
º이번에 기댔던 작품│영화: 임순례, 「리틀 포레스트」, 2018
º Photo by @sigmund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