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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것이프로젝트 Mar 25. 2019

월요일 아침부터 넘어진 사람의 일기

< 월간 이것이 3월호 > 넘어지다(fall)

넘어진 날 아침 들었던 상큼한 노래를 들으며 읽어주세요

♬ 앤-마리 (Anne-Marie) - 2002 (Live)


말 그대로 '넘어진' 게 얼마 만이었더라


 월요일 아침부터 ‘넘어졌다’. 지난 모임에서는 무엇인가에 빠지고 말았을 때 ‘00에 넘어졌다’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고, 그 표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 그런 의미로 ‘넘어지다(fall)’라는 말을 쓴다면, 내 인생은 하루에도 수없이 넘어지는 인생일 테고, 나는 그 넘어짐을 누구보다도 반기는 사람일 테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에는 말 그대로 ‘넘어졌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나온 터라 급하게 걸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고, 핸드폰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무릎이 까지도록 넘어진 것은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뒤이어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는 에스컬레이터의 마지막 구간에서 발을 헛디뎠을 때, 어떻게든 넘어지는 건 피하려 온몸에 힘을 줬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넘어질 수밖에 없겠구나, 자각하고 넘어지자마자 재빨리 일어나 걸어갔다. 뒤이어 오는 누구라도 “괜찮아요?” 그렇게 물어오면 지나치게 부끄러운 아침이 될 것 같아서, 그 누구도 말을 걸어오기 전에 재빨리 일어나 걸어갔다. 발목도 아프고, 무릎도 아팠지만 절뚝거리면서 빠르게 걸어갔다. 넘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과 앞으로 볼 일 없대도 같은 칸에 타면 민망할 것 같아서, 계단을 내려가서도 몇 걸음을 더 옮겨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뜬금없지만 씩씩하게 잘 걸을 것 같은 강아지 친구


 하필 이런 날 나는 왜 크림색 바지를 입고 싶었던 걸까. 주말 내내 청바지를 입은 탓에, 다른 색 바지를 입고 싶다는 생각에 꺼내 입은 크림색 바지에는 검은 얼룩이 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검은 얼룩을 털어냈다. 생각보다 얼룩은 잘 지워졌고, ‘세탁만 잘 하면 되겠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도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무릎이 욱신거려서 멍이 크게 들었나 보다, 정도 생각했다. 이 정도 넘어지면 멍이 어느 정도로 시퍼렇게 드는지 궁금했지만, 공공장소에서 확인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하게 걸었다.


그런 마음으로 회사를 출근했는데, 무슨 일인지 사무실에 불이 꺼져 있었다. 처음으로 출근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이것이 기회다’ 하고 내 자리에 와서 무릎을 확인했다. 멍들었을 줄 알았던 무릎이 까져 있어서 조금은 당황했지만, 귀엽게 봐줄 정도로 까진 상태라 괜찮았다. 이렇게 무릎이 까지도록 넘어진 게 얼마만의 일인가, 새삼스럽게 과거를 회상할 여유가 생길 정도의 상처. 뒤이어 걸어가는 누군가에게 에스컬레이터나 계단을 내려갈 때 조심해야겠다는 찰나의 경각심 정도를 심어주지 않았을까. 누구보다 빠르게 일어나서 씩씩하게 걸어갔으니, 그 정도는 넘어져도 괜찮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움 그 자체인 공드리 영화


조금 멍청하지만 조금은 낭만적인


 매 순간 좋아하는 것들에 넘어지면서 살아왔지만, 요즘은 더 정신없이 좋아하는 것들에 넘어지며 지냈다. 하도 좋아하는 것들에 넘어지느라, 에스컬레이터 계단도 제대로 못 보고 현실에서 넘어졌나 보다. 머리 아픈 고민을 하느라, 해야 할 일을 계획하느라, 못다 끝낸 일이 마음에 걸려서, 갑작스럽게 발견한 문제의 해결 방안을 찾느라 눈앞의 계단도 못 보고 넘어진 게 아니다. 요즘에 넘어진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느라 무릎이 까지도록 넘어지다니, 조금 멍청해 보이기는 하지만 조금은 낭만적인가 싶기도 하다. 미셸 공드리의 영화에 나올 법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주인공과 조금은 닮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건 내가 넘어져서 스스로 넘어지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해서 할 수 있는 뻔뻔한 말이다 – 분명 뒤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다가 갑작스레 넘어지는 사람을 목격한 사람은 “저 사람 왜 저래?” 하고 깜짝 놀라고 넘어가는 게 전부였겠지.


이미 새해가 시작한지 꽤 시간이 흘러서, 새해 인사를 건네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지만, 다들 수없이 좋아하는 것들에 넘어지고, 넘어진 이야기들을 나눌 사람이 있는 새해를 보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것들에는 넘어져도, 계단에서는 넘어지지 않는 안전한 해였으면 좋겠고. 혹여 계단에서 넘어진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너무 부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괜찮아요?”라는 말은 조금 상황을 살펴보고 건네는 것으로 하자. 혹시 계단에서 넘어지더라도, 다친 곳 없이 씩씩하게 다시 걸을 수 있는 해가 되기를. 좋아하는 것에 수없이 넘어지고, 실제로 넘어지기까지 한 사람이 전하는 마음이니까 이루어질 게 분명하다! 


PS. 이제 넘어진 지 딱 3주째 되는 월요일입니다 상처는 아물고 있고 계단을 내려갈 때 조금 더 조심성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여전히 좋아하는 것들에 넘어지며 살고 있고요 넘어진 이야기들을 나눌 사람들이 있어 고맙고 다행인 요즘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넘어지는 게  덜 두렵고, 넘어진 누군가를 만났을 때 손잡아줄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 마음이 계속되길 넘어진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면서 - 다들 행복한 3월 보냅시다~!~!


#이것이프로젝트 #이것이 #일상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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