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파이 Dec 11. 2022

나르시시즘, 그 매혹적인 사랑과 혐오에 대하여

황이안


‘Narcissistic, my god, I love it 

서로를 비춘 밤 

아름다운 까만 눈빛 더 빠져 깊이 

넌 내게로 난 네게로’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을 것 같다. 아이브의 ‘love dive’라는 곡인데, 이 곡은 나르시시즘을 주제로 하고 있다. 나르시시즘에 대해서는 늘 비판적 입장이 많은 가운데 이 곡에서는 나르시시즘을 사랑의 한 종류로서 굉장히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들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매력적인 모습을 뽐내고는 한다. 스스로와 사랑에 빠진 모습은 자존감이 높거나 자기애가 충분한 사람으로 비춰져 타인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쉽다. 필자 역시 나르시시즘이란 굉장히 매혹적인 사랑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만큼은 결코 아름답지도 매혹적이지도 않은 나르시시즘에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사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는가?

그렇다. 사실 나르시시즘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은 단순 자기애가 아닌 정신질환의 일부로 분류된다. 보통 자기애성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라고 불리는데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완벽한 사람이라고 상상하면서 그 환상 속에서 만족 및 쾌락을 얻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열등감이나 질투와 같은 부정적 감정 그리고 자기혐오를  회피하기 위해 완벽하고 아름다운 가짜 자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짜 자아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왜곡된 자아만을 더 부풀리고, 높은 목표치와 이상을 갖는다. 그리고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종종 다른 사람들을 낮게 평가하거나 공격하기까지 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가짜 자아를 지키기 위함이다. 더 정확히는 가짜 자아가 사라지고 자신이 혐오하는 진짜 자아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 때문에 가짜 자아를 만들어내고 그 가짜 자아를 사랑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가짜 자아에 만족하며 쾌락을 맛 볼 수록 현실과의 괴리감은 더욱더 커진다. 현실과의 괴리감이 커질수록 이를 회피하고자 또다시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이와 관련한 프로이트의 주장이 있다.  나르시시즘이란 용어는 본래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가 처음으로 만들었지만 프로이트의 저서를 통해 대중화되었다.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유아기로의 퇴행이라고 주장한다. 유아기의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보호자로부터 의식주에 대한 돌봄을 받게 된다. 이때 아기들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느낀다. 언제나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서 자신을 돌봐주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현상이 청소년기까지 이어지기도 하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1차적 나르시시즘이라고 칭했다. 사람들은 유아기를 벗어나 1차적 나르시시즘이 끝나더라도  배신, 비난, 결별 등을 겪어 사랑할 수 없게 되거나, 애정을 베풀 수 없을 때 다시 유아기로의 퇴행이 이루어진다. 유아기로의 퇴행이 이루어지고 나면 유아기 때 그랬듯 다시금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절망과 절망을 겪은 스스로의 모습을 인식하는데 실패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인데 


네케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나르키소스 이야기에서 나르시시즘이란 용어를 따왔다. 이야기에 따르면 나르키소스는 매우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막상 본인은 사랑을 증오하고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를 사랑한 한 님프(그리스 로마 신화 속 정령)가 나르키소스도 사랑의 고통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를 들은 응보의 여신 네메시스는 소원을 들어주었고 나르키소스에게 저주를 내린다. 바로 물에 비친 본인의 모습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었다. 몇 날 며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바라보던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만 물에 비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로 자살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나르시시스트들의 특징이다. 자기 인식에 실패하는 것. 결과적으로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모습만을 한없이 바라보다 자살을 하게 된 것인데 이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보다 죽음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나르시시스트들이 자기 인식에 실패하는 것 역시 자기혐오가 야기해낸 것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어른이 되었어도 절망을 겪고 나면 절망하는 스스로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나르시시즘의 길로 인도하며 네르키소스 이야기처럼 가짜 자아에 빠진 나머지 진짜 자아를 인식하지 못해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르시시즘과 자기혐오는 종이 한 장 차이이자 악순환 관계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해야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사랑하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 사랑이 사랑이 맞을지, 혹시 혐오는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내 OTT 플랫폼 경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