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힘이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
"병원이야. 새벽에 갑자기 가슴이 아파서... 대훈이가 119 불러서 왔어."
"어느 병원이요? 지금 갈게요."
병원 이름을 듣고 서둘러 옷을 입었다. 택시를 불러서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할머니마저 잃게 된다면...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동생 대훈이가 초조한 표정으로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나를 보자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왔구나."
"할머니는 어떻게 됐어?"
"지금 검사 중이야. 의사 선생님이 심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
심장.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대훈이가 나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혔다.
"누나, 괜찮아?"
"응... 그냥 갑작스러워서."
두 시간 정도 기다린 후 의사가 나왔다. 중년의 남성 의사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보호자분들이시죠?"
"네, 손녀들입니다."
"할머님께서 심근경색을 일으키셨어요. 다행히 빨리 오셔서 큰 위험은 넘겼지만, 당분간 입원 치료가 필요합니다."
심근경색. 생각만 해도 무서운 병이었다. 의사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할머니의 나이를 고려할 때 완전한 회복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앞으로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면회는 언제부터 가능한가요?"
"지금도 가능해요. 다만 너무 오래 계시면 안 되고, 할머님께서 충격받을 만한 이야기는 피해주세요."
할머니가 계신 병실로 들어갔다. 산소마스크를 끼고 누워 계신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강인해 보이셨는데, 지금은 너무 작고 연약해 보였다.
"할머니..."
내 목소리를 듣고 할머니께서 눈을 뜨셨다. 마스크 때문에 말씀하기 어려우셨지만 손짓으로 다가오라고 하셨다.
"할머니, 무리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이 안정을 취하라고 하셨어요."
할머니께서는 내 손을 꼭 잡으셨다. 그 손이 예전보다 훨씬 차갑고 말랐다. 언제부터 할머니가 이렇게 늙으셨을까? 내가 너무 내 일에만 신경 쓰느라 할머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잠시 후 할머니께서 산소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매화야, 할머니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할머니, 말씀하지 마시고 쉬세요."
"아니야. 이거 하나만 말할게. 네가 책 낸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할머니 소원이 네가 행복하게 사는 거였거든."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걱정해 주시는 할머니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할머니, 빨리 나으셔서 제 책 첫 번째로 읽어주세요."
"그럼. 꼭 읽을게."
할머니께서 다시 마스크를 끼고 눈을 감으셨다. 잠시 후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병실을 나와서 대훈이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했다. 당분간 교대로 병원에 와서 할머니를 돌봐야 했다. 다행히 대훈이가 세무사 시험에 합격해서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어서 시간 조정이 가능했다.
"누나는 책 일도 있고 하니까 내가 주로 할게."
"고마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이수현 부장이었다. 오늘 출판사 대표와의 만남이 있다는 걸 깜빡했다.
"부장님, 죄송해요. 할머니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상황을 설명하자 이수현 부장은 당연히 가족이 우선이라며 이해해줬다. 대표와의 만남은 다음 주로 연기하기로 했다.
그날부터 병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이 시작됐다. 낮에는 대훈이가, 저녁에는 내가 할머니를 돌봤다. 할머니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병원에서 할머니를 지키면서 노트북을 가져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수현 부장이 전체적인 스토리 구성을 위해 내 인생의 연대기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주요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들, 힘들 때마다 품어주셨던 따뜻한 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내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지금까지는 그저 살아내기에 급급했는데, 이렇게 정리해서 보니 내 인생에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써 내려가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들이 많았다. 엄마의 엄격함이 사실은 나를 보호하려는 마음이었다는 것, 아빠의 따뜻함이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할머니의 사랑이 내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는 것...
며칠 후 할머니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됐다. 산소마스크도 떼고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졌다.
"매화야, 요즘 뭐 하고 있니?"
"할머니 병문안 오고, 집에서 글 쓰고 있어요."
"글? 책에 들어갈 글 말이니?"
"네. 제 인생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어요. 할머니 이야기도 많이 나와요."
할머니께서 웃으셨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미소였다.
"할머니 이야기도 나온다고? 부끄럽네."
"할머니가 얼마나 저를 사랑해 주셨는지, 얼마나 힘이 되어 주셨는지 다 써놨어요."
"그래? 그럼 할머니도 기대되는구나."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들, 밤늦게 공부하는 나를 위해 끓여주셨던 라면,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해주셨던 따뜻한 말들...
이 모든 것들이 내 책에 들어가야 할 소중한 내용들이었다. 갑자기 책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내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온 희망의 이야기였다.
일주일 후 드디어 출판사 대표와의 만남이 성사됐다. 할머니의 상태가 안정되자 대훈이가 괜찮다며 나를 보냈다.
출판사는 홍대 근처의 작은 건물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가니 아담하지만 책들로 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이수현 부장이 마중 나와서 대표실로 안내했다.
대표는 50대 초반의 차분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내가 들어가자 일어나서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름출판사 대표 김진우입니다."
"안녕하세요. 홍매화입니다."
"수현 부장에게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직접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진우 대표는 내 블로그를 직접 다 읽어봤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내가 보낸 연대기 초안도 검토했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요. 요즘 자기계발서나 에세이가 너무 많이 나오거든요. 하지만 매화씨 이야기는 달랐어요."
"어떤 점이 다른가요?"
"진정성이에요. 꾸미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진실함이 느껴져요.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이 있어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는 힘 말이에요."
김 대표의 말을 들으니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러웠다. 그동안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의미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나오면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 거예요. 저희도 그런 책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구체적인 출간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원고 완성까지 3개월, 편집과 디자인에 2개월, 총 5개월 후 출간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일정이었다.
"부담스러우시면 일정을 조정할 수 있어요."
"아니에요. 오히려 좋아요. 빨리 세상에 내보내고 싶어요."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이수현 부장이 말했다.
"대표님이 매화씨를 정말 좋게 보시는 것 같아요. 저도 이런 대표님 모습은 처음 봐요."
"정말요?"
"네. 평소에는 되게 신중하신 분인데, 오늘은 확신에 차 있으셨어요."
집에 돌아와서 할머니께 오늘 있었던 일을 전화로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내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신다며 웃으셨다.
"할머니, 제가 정말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될 수 있지. 네가 못할 게 뭐가 있니?"
할머니의 응원을 받으니 용기가 났다. 이제 정말로 본격적인 원고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그날 밤 새 노트북을 켜고 첫 장을 열었다. 제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다시, 매화꽃이 피었습니다.' 내 인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까?
첫 문장을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이 울렸다. 전남편이었다.
"매화야, 미안한데... 아이들이 또 너를 보고 싶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