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여섯
더위와 모기와의 싸움으로 밤새 잤지만 잔 듯 만듯한 잠. 그나마 날이 밝아오고 나서야 제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누군가 내 몸에 스멀거리며 걸어 다니는 느낌에 눈을 떴다. 개미다. 멀리 날려 보냈지만 어느새 다시 또 내 옆에. 하아, 아침부터 날이 덥다. 1시에 떠난다던 루이스는 1시 비행기로 떠난단 이야기였는지 보이질 않는다. 빨래를 돌리고, 책을 읽는다. 어제 완님과 함께 만난 한인교회 목사님이 빌려주신 어느 알제리 교민분이 쓴 알제리에 관한 책인데 흥미롭다. 비는 책을 좀 보더니 이렇게 자기 주관과 세계관이 강한 글은 좀 부담스럽다고 했고, 나는 그의 주관이 흥미롭다. 책은 에덴동산 이야기로 시작해 이슬람 문화와 참치회가 등장하고, 뭔가 상상 이상의 묘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허를 찌른달까? 어느 정도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대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이 정말 다양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열심히 넘긴다. 독일부터 손빨래만 하고 세탁기를 돌리지 못해 빨래가 산더미인지라 빨래만 널고 나가야지 했는데 세탁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서 빨래를 탁탁 털어 널고 났을 때는 벌써 정오가 다 되었다. 그래도 해가 쨍쨍해 금방 마를 거 같다. 날이 더워도 살랑살랑 부는 시원한 바람이 참 좋다. 라바흐가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커다란 수건만 걸친 채 돌아다니다 급기어 농구공을 들고 강아지와 농구를 한다. 저러다 수건 떨어지면 어쩌려고? 안에 뭘 입긴 한 거니? 괜스레 내가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하지만 뭐랄까? 이 잉여들의 평화로운 아침은 좀.. 어딘가에 저장해 두고 싶은 순간이다.
센터까지 걸어 나와 사람들이 꽤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원의 바디 랭귀지가 동원된 거창한 추천으로 카르페 하나, 샌드위치 하나, 콜라, 주스를 시켰다. 비는 계산서에 쓰여 있는 1,120 디나르를 내며 물가 대비 식당의 가격이 센 거 같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비싼 동네에 와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치면, 명동, 강남 정도? 카페는 우리의 기준으로는 디자인을 신경 쓰지 않은 시골 동네 보통 가게 정도로 보였지만, 옆자리에 앉은 한껏 차려입고 나온 듯한 예쁜 아가씨들이 크레페를 하나씩 시켜놓고 인증샷을 찍는 듯한 모습이 흡사 홍대의 디저트 가게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다(물론 시각적 이미지는 많이 다르지만). 나오는 길, 비는 알제가 우리나라 7~80년대 개발 붐이 전이랑 비슷한 모습 같다고 했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 같기도 하다. 대부분의 구도심 건물은 프랑스 식민시대 때 지어졌다고 했는데, 그 시절이 1830년대부터 1960대까지이니 벌써 5~60여 년이 흘렀지만, 건물 보수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느낌. 여기저기 색이 바래고, 벗겨진 페인트는 내게 익숙한 풍경들과는 많이 달랐다.
점심을 먹고 비가 이곳에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에 가보자고 해서 길을 나섰다. 여행 틈틈이 코워킹 스페이스를 찾아다녔던 우리지만, 알제리에도 코워킹 스페이스가 있다는 사실은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정말, 알제리에도 코워킹 스페이스가 있어? 이런 느낌이었달까. 어렵사리 찾은 바닷가 근처 건물의 반지하에 위치한 코워킹 스페이스 sylabs에서는 몇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다. 공간이 정리되진 않았지만, 꽤 넓고 쾌적한 공간이다. 역시나 소통의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 대충 이런저런 (어떤 관심에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다 그가 권해 자리 잡고 않아 컴퓨터를 켰고 3시간 넘게(그곳 문 닫을 때까지) 일을 했다. 비는 출시를 앞둔 앱 관련 일을 하고, 나는 글을 쓰다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들은 갑자기 나타나 자연스럽다는 듯(물론 그쪽에서 먼저 앉으라고 권하고 와이파이 비번도 알려줬지만) 몇 시간째 아무 말 없이 앞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 우리가 왜 그랬지? 뭔가 이상한 거 아냐? 나는 머릿속을 떠나니는 생각을 꺼내 비와 나눴고 그는 밖에서 과일주스를 사다 돌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런 정도의 느낌으로.
뒤늦게 물어보니 이곳은 8개월 전에 생긴 알제리의 (현재까지는 아마도) 유일한 코워킹 스페이스라고 했다. 아직 멤버들이 많지 않아 융통성 있게 멤버십을 운영하는 듯했다. 내가 단기 사용이 가능하냐고 물으니 한 달에 8000 디나르(한 50달러 정도)이니 그걸 기준으로 주간으로도 나눌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공간에서는 사진 전시를 하고 있었고 3D 프린터와 다른 장비들도 꽤 있었다. 워크숍 공간을 대관하기도, 이런저런 교육을 실행하기도 한단다. 1인 기업이나 작은 규모의 사업, 프로젝트, 일을 하는 프리랜서나 팀이 늘어나면서 저렴한 비용에, 공유하더라도 고퀄리티의 공간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세계 전반적으로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많이 보아온 풍경이지만 아직까지는 어느 정도 경직된, 혹은 변화가 빠르지 않은 사회로 보이는 이곳 알제리에도 이런 바람과 니즈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게 뭔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이지 공유(에너지 세이빙), 공간 사용(문화 창출), 디자인(경험 개선), 기술(프로세스 효율화)은 지역마다 속도의 차이, 문화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곳에서 점차적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이슈인 듯하다. 무작정 들어와 공간을 쓰기 시작했지만 약간이라도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 같아서 물었더니 공간 사용하기가 어땠냐며 오늘은 그냥 가고 나중에 다시 오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올게라는 말을 남겼고, 그들은 우리를 다시 오라는 말로 우릴 보냈다. 다시 올 수 있으려나?
아직 잘은 모르지만 나는 알제가 안전한 느낌이다. 곳곳에 경찰들이 있고 (물론 범법자로서 경찰들이 너무 많은 것이 조금 찔리지만), 사회 전반의 이슬람 문화로 인해 음주를 할 수 있는 장소도 거의 없고(물론 그래도 마실 사람은 다 마시는 거 같다. 우리 집 애들은 맨날 마시는 듯함), 다들 복장도 정숙하고(앗. 무릎 내놓고 다니는 여성이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두가 히잡을 쓴 건 아니지만 반바지 입은 사람은 젊은 청년과 아이들 정도? 설마, 여성이 반바지 입는 게 불법은 아니겠지? 튀지 않으려면 내일부터 복장에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 경찰의 주목을 받고 싶지는 않으니), 여행자들도 거의 없어서 (설마 아예 없진 않겠지만 아직까지 우리 눈에는 우리만큼 외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만나진 못했다) (공급이 적어) 특별히 관광객 사기 같은 것도 딱히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외식문화도 딱히 발전하지 않은 거 같다. 피자, 햄버거, 크레페, 케밥 정도가 흔히 보이는 식당이고 알제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어딘질 모르겠다. 당연 도시마다 있는 거라고 생각해던 관광정보센터의 존재도 확인이 안 된다. 우리는 저녁으로 빵과 과일을 잔뜩 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저녁을 먹으려는데 또, 정전이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은 정전이 아니라 물이 안 나오는 거나 혹은 둘이 함께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거였나 보다. 핸드폰 빛에 의지해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개와 놀다 하루를 마감한다. 내일은, 오랑에 간다.
< 표지 사진 : 숙소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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