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프로젝트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그때,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는 친구와 여행을 위한 적금통장을 하나씩 만들었다. 우리는 조금씩 돈을 모아 성인이 되면 함께 배낭여행을 가자고 약속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1월. 각자의 통장에는 백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이제 때가 되었으니 여행을 가자고 했고, 그 친구는 자기는 아무래도 그 돈을 노트북을 사는데 써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서운한 감정이 들었고, 나중에는 나도 노트북이 필요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돈은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이 아닌 나의 첫 자립여행을 위해 모은 것이었으므로 혼자라도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하면 혼자 여행을 갈 수 있을까?
그때는 한 포털사이트의 인터넷 카페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몇 날 며칠 동안 여행카페에서 비행기표를 사는 법부터 시작해 사람들이 어떻게 동행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지, 겨울 여행지로 어디가 좋은지 등을 찾으며 온라인 정보 숲 속을 헤맸다. 통장에 있던 돈으로는 가보고 싶던 유럽까지 가기엔 무리가 있었고, 또 다른 후보지였던 중국에는 혼자 갈 자신이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2월 중순 한 인터넷 여행카페에서 사람들을 모아 진행하는 <천진 - 북경>행 열흘짜리 선박 자유여행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처음 만나는 자유
십 수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날의 느낌이 생생하다. 어린 딸을 혼자 보내는 걱정스러운 맘에 이런저런 당부의 말을 전한 엄마가 나를 데려다주고 돌아간 뒤, 춥디 추운 인천 부두에 홀로 남은 나는 스무 명가량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 설렘 반 두려움 반의 감정을 가지고 난생처음 보는 커다란 배에 올랐다. 스무 시간을 넘게 배를 타고 중국으로 향하는 내내 게임을 하며 사람들과 친해졌고, 자판기에서 한국돈으로 300원 정도 하던 칭다오를 뽑아 마시며 신이 났고, 거센 파도에 멀미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혼돈 속에서 괜스레 나도 헛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술에 취한 건지, 파도에 취한 건지, 그도 아니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의 만난 자유에 취한 건지 다양한 감정이 고조되었던 그 여행의 첫날밤을 나는 대학 입학 후 동기들과 간 신입생 환영회라던지, 학교 MT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여행에서 나는 막내였고, 여자 혼자 온 여행자는 나 밖에 없어서 여행 내내 여행 주선자인 투어 컨덕터와 방을 썼다. 그분은 여행사에서 오래 일한 경험이 있는 40대 여성분이셨는데 여행을 너무 좋아해서 한국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현지 랜드사만 끼고 사람들을 모집해서 여행을 주선하고 본인은 공짜 여행을 하신다고 했다. 그렇게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만리장성에 올라보고, 자금성을 둘러보고, 왕푸징 거리에서 쇼핑을 하고, 낯선 중국인 남자에게 밸런타인데이 꽃을 선물 받고, 춘절 폭죽 세례에 귀를 막고 도망치고, 8차선 도로에서 당당히 무단 횡단하는 중국사람들 뒤꽁무니를 쫒으며 가슴을 졸였다. 중국에서 보낸 열흘 내내 낯선 나라의 언어, 음식, 사람들의 행동이 너무 신기해 여기저기서 눈이 휘둥그레졌더랬다. 함께 간 사람들은 내게 막내가 자꾸 단독 행동을 한다며 애정 어린 타박을 줬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단체로 다니는 여행이 그때부터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여행이 나의 첫 배낭 멘 여행이자 마지막 단체 여행이었다. 북경의 바람은 분명 서울의 그것과는 달랐고, 주변을 둘러보는 나의 시선과 내게 들어오는 감각도 달랐다. 모든 것이 훨씬 더 진하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것은 익숙하지 않음. 즉, 다름에서 비롯된 경각심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름은 우리에게 영감(insparation)님을 보내주십니다.
그게 시작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나는 낯선 곳에서 느낀 설렘과 자유에 대한 그리움이 남았고, 통장에 돈도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다시 여행카페를 헤맸고, 그해 3월 필리핀에서 유학 중인 나보다 한 살 많은 학생과 연결되어 한국에서 나를 포함한 3명의 여행자를 모아 필리핀으로 향했다. 학생이 학기 중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나는 내 결정을 이해를 해주는 교수님께는 감사를 전하고 이해를 못하는 교수님께는 어쩔 수 없음을 표명한 채 뜻대로 여행길에 올랐다. 내게는 나름의 변명이 있었는데, 나는 관광학과 학생이었으므로 여행은 현장학습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3주간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에서 시작해 파나이 섬을 거쳐 팔라완 섬에 있는 엘리도까지 배와 로컬버스만 타고 다닌 그 여행은 진정한 배낭여행이었다. 그 말은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한 다양한 문제들, 예를 들면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샤워시설이라던지, 창문 없이 모래길 위를 달리는 버스라던지, 대중교통이 없는 섬이라던지, 일곱 시 이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서의 밤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는 뜻이다. 제한된 열악한 환경의 경험은 사람의 창의력을 높여주고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준다. 나는 불 꺼진 밤에 별을 즐기는 법과 동네 주민에게 바디랭귀지를 동원해 히치하이킹을 하는 법, 스카프로 먼지 가림 마스크를 만드는 법, 낯에 양동이에 물을 받아 햇빛에 놓아두어 온기가 남아있을 때 샤워를 마치는 법 등을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여행에서 조금씩 낯선 곳의 환경을 배우며 그전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내가 누리고 사는 것들에 대한 감사와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유명한 사람이 되진 않았지만 꿈이 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무 살, 필리핀 여행 이후 나는 꾸준히 돈을 모아 여행을 하는 삶을 살았다. 짧게는 열흘, 길게는 1년씩 이어지는 여행을 수차례 하며 서른 개가 넘는 나라를 가보았고, 몇 백의 도시들을 만났다. 1년 동안 워킹홀리데이로 북미의 스무 개 정도 크고 작은 도시들을 돌아다녔고, 러시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핀란드 헬싱키까지 까지 가 보았으며, 북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선 어쩌다 보니 마음 졸이며 한 달간 불법체류자 생활을 해 보기도 했다. 서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나는 매년 1개월씩은 여행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지키며 살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관광학과를 나와 그 정도 여행을 했다면 아마 내가 지금쯤 큰 여행사의 중요 직원이나 유명한 여행작가쯤은 되지 않았을까라고 내 삶을 추측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은 내 직업이 되진 않았다. 여행은 내게 경제적 수단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에게 직업으로서 교육과 교육환경을 제공하는 일을 하는데 여행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이 매우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자부할 수 있다. 내가 주어진 삶이 아니라 내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성장하는데도 여행은 큰 역할을 했다. 나는 여행으로 인해 유명한 사람이 되진 않았지만 꿈이 분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은 그대가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삶을 꿈꾼다면 나는 당신에게 여행자의 삶을 추천하고 싶다.
여행은 그대에게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유익함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는 타향에 대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며, 마지막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 인도 철학자, 브하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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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부탁으로 청소년 잡지에 기고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