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나는 말이지 - 하우스에서만 와이프 @ home
“나는 누가 나한테 헌신하라는 말을 하는 게 정말 싫어.”
“왜?”
“그게 내가 기꺼이 해야 의미가 있는 건데 자꾸 강조하고 강요하니까 오히려 희생당하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 말을 한 사람이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닐 거 같아.”
“응. 하지만 세상에는 의도치 않게 사람들을 통제하고 행동을 제한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 근데 의도가 나쁘지 않으니까 그냥 넘어가면 그런 제약 속에서 살게 되는 거 아닐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신뢰 놀이를 진행한다. 내가 했던 첫 신뢰 놀이는 친구에게 받아 줄게라는 다짐을 받고 선 자세에서 눈을 감은 채 뒤로 몸을 넘어뜨리는 것이었다. 친구가 장난으로 약속을 어기고 받아 주지 않는다면 뒤로 자빠지며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게임이다. 많은 아이들이 그 게임에서 친구가 받아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친구의 팔에 몸이 닿기도 전에 눈을 뜨고 발을 디뎌 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서로 깔깔대며 끝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게임을 비교적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친구의 장난에 크게 다칠 뻔했는데, 그곳이 바닥에 뭔가 깔려 있는 실내였기에 망정이지 평소처럼 실외였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그 후 나는 그 놀이를 하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친구를 그저 믿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릴 적 놀이로 시작된 신뢰에 대한 이해는 가족, 친구, 동료의 다양한 관계를 거치며 성장하면서 그 중요성이 더해졌다. 놀이가 아닌 실전에서 신뢰가 깨지는 경험은 더 큰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상처에 취약한 어른으로 성장하여 두려움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안전한 행동반경의 범위를 만들어주고 동시에 많은 선택을 제약한다.
사랑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활동이라 우리는 사랑 앞에서 평소보다 훨씬 말랑해진다. 감성이 높아져 있는 그 상태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더 쉽게 상대를 믿거나 상처 입게 하기도 한다. 사랑이 매력적이면서도 두려운 이유이다. 우리가 사랑에서 받는 상처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건 대부분 상대방의 존재나 행동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나의 기대와 현실 사이의 차이 때문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어떤 기대와 확신을 신뢰라 부르는데 그것은 앎을 전제로 한다. 사랑할 때 우리는 더 쉽게 신뢰하는데 그 신뢰의 기반이 꾸준하고 지속적인 상호 작용에 의한 알아감이 아니라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게 증폭된 감정에서 비롯되었을 경우, 현실과 기대의 차이는 더욱 쉽게 드러난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에서 보다 쉽게 신뢰가 깨지고 더 큰 상처를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함께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이미 그와 1년 넘게 연애를 했고 2년을 넘게 알던 사이였다. 그런데도 그와 함께한 1년짜리 여행 초기에 그에게 크게 실망하고 상처 받았더랬다. 한 백번쯤은 그와 함께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긴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픈데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에 서운했고, 아픈 몸을 무리해서 끌고 다니다 결국 더 아파서 앓아누워 여행을 정체시킬 때마다 화가 났다. 뭔가 보여 주고 싶어 열심히 알아보고 어디에 가자 그러면, 카페에서 일만 하며 자신은 그것도 여행이라며 내게 관광객같이 여행한다고 했을 땐 내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서럽기까지 했다. 그가 기대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그가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상처 받았다. 사실 그는 자신의 성격과 취향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가 내 기대대로 움직이는 사람일 것이라는 믿음은 내 머릿속에만 존재했던 것이지 그와 합의한 적도 없었다. 내 상처는 우리가 비슷한 것을 좋아하리라는, 상황에 비슷하게 대처하리라는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아마 열 번쯤은 ‘우린 안 맞아, 세상에 남자 많은데 더 잘 맞는 남자를 찾아보자’며 그의 손을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둘의 관계가 삶의 중심에 있는 여행 중이었다. 그는 배테랑 여행자를 자부하는 내가 여행 중 고민해야 할 가장 큰 일상이자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거의 유일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