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휴~ 덥다, 더워.’라는 말이 저절로 잎 밖으로 흘러나온다. 아침, 파리를 떠날 때 내리던 부슬비가 그립고, 우리를 배웅하는 축복이었던냥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생각하는 아프리카의 더위, 사막의 더위는 아니다. 그저 한 여름, 땡볕에서 끝없는 언덕길을 오르며 길을 찾아 헤매는 15Kg 배낭을 멘 여행자라면 어디서든, 누구든 느낄 수밖에 없는 더위이자 갈증에 가깝다. 우리는 알제리에 도착했다.
우리가 선택한 알제리행 교통편은 파리 - 알제, 에어 프랑스이다. 북유럽에서 내려오는 우리의 일정과 직항여부, 비용을 고려했다. 파리는 내게 솔직히 말해 굳이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알제리의 파리 식민 역사 때문인지 다른 지역에 비해 직항이 많고 비용이 저렴한 편이었다. 파리에 머무는 나흘 중 하루를 전에 방문하지 못했던 오르세 미술관을 둘러보는데 썼는데, 그곳의 오리엔탈리즘관에서 알제리를 비롯한 19세기 아프리카의 삶을 모델로 한 그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코끼리, 낙타 등의 서양화에서 쉽게 등장하지 않는 동물들을 그린 그림들도 참신했지만, 알제리의 구전 민담을 소재로 그렸다는 남녀의 그림은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 채 밀회를 나누는 느낌이어서 뭔가 묘하다고 느꼈다. 불현 알제리가 이슬람 국가임이 상기되며 혹시 연애 등에 규제가 심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자마자 안내센터에 문의하여 공항 내에서 무료 심카드를 받고, USD 20달러를 환전했다. 무료심카드는 항상은 아니고 프로모션 기간 같았는데, 전화번호와 통화용으로 100 디나르를 무료 충전 해 주웠다. 아직 알제리 돈인 디나르와 현지 물가에 대한 개념이 없었지만, 환전소에서는 1달러는 108 디나르라고 적혀있었다. 당장 이곳을 벋어나려면 현지 화폐가 필요했으므로 최소금액을 환전하기로 했다. 나는 (이제 아마 우리는 이라고 생각하는데) 환율이 센 공항 환전소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다. 흥미로운 점은, 공항 안 밖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환율에 환전을 해 주겠다며 핸드폰 계산기를 들이밀었다는 점이다. 1달러에 120 디나르부터 시작한 숫자는 최대 150까지 올라갔는데, 순간 혹하는 마음이 들어 '바꿀까'하고 비를 쳐다봤지만 그는 소신 있게 ‘노'라는 표정으로 되받았다. 나는 하긴 가격차가 너무 커 오히려 확실히 바꿔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기도 하네라며 마음을 접었다. 우리에겐 일단 2,150 디나르(USD 20달러 환전한 금액) 가 있었고, 그거면 숙소까지 가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상당히 많은 시간을 택시기사들과 실랑이를 한 끝에 여기저기 묻고 물어 어렵사리 공항 밖 버스정류장에서 시내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로 시내, 내려서 택시가 우리가 머물 airbnb 숙소의 호스트가 추천한 길이었다. 공항에서 버스 정류장을 찾느라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는데, 머잖아 공항인데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영어 표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낯선 곳에 도착했다는 설렘과 앞날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듯한 절망의 양면의 감정으로 다가왔다. 하긴, 아랍어와 불어가 공용어로 쓰인다니 거기에 굳이 영어까지 하는 건 현지인에 입장에서 어려운 일일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택시기사와 환치기 등 목적형 접근자들은 빼고는 다들 소통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순수하게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돌려, 100 디나르는 1달러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둘이 합쳐 100 디나르(1 달러. 택시 기사들이 부른 금액은 50 달러에서, 최소 30 달러였음)에 무사히 시내까지 들어오는 쾌거를 이루자 호스트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비에게 일단 밥을 먹고 지도에서 숙소가 그리 멀어 보이지 않으니 숙소까지 걸어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길가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식당을 제안했다. 가격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일단 콜! 뭐 카드도 있고.. 첫날, 첫 식사니까. (공항 버스비가 50 디나르인 걸 보면 물가가 꽤 저렴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우리의 첫 제안은 참담한 실패였다. 식당은 카드를 받지 않는데 가격은 비싸서 우리는 주머니를 털어 1500 디나르에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메뉴를 먹었으나 만족도가 떨어졌고, 숙소 가는 길은 생각보다 녹녹지 않았다. 구글 맵에서 보여준 그 2km가 채 안돼 보이는 길은 엄청난 산길이었고, 심지어 지름길로 보이는 많은 계단 길들은 지도에 나와있지도 않았다. 이제 남은 돈이라곤 500 디나르뿐이어서 차마 택시를 잡아탈 용기도 나질 않았다. 가방은 점점 무거워져만 가고, 바닥의 흙먼지를 한 움큼 집어 먹은 듯 목은 까슬까슬해져만 갔다. 아, 시원한 콜라 한입만 먹었으면... 한 시간 넘게 헤매고 헤매, 전화를 걸고, 도움을 받아 숙소에 도착하니 3시가 넘었다. 살다 살다 처음 경험하는 비탈길 산동네, 문을 열고 들어가서도 또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그곳. 하프 알제리안, 하프 프렌치라고 자신을 소개한 예쁘고 친절한 호스트 루이스는 함께 작업 중인 친구들과 사람을 엄청 따르는 개(이름이 너무 어려워 차마 불러주지 못하는)를 소개하여 주고는, 아주 오래된 집의 허름한 주방과, 그래도 해가 드는 게 썩 운치 있는 뒷마당의 해먹, 타일 바닥에 덩그러니 매트 하나 깔려있는 우리의 방을 하나씩 구경시켜 주었다. 아. 여기는구나. 3일만 예약하길 잘 했다. 근데, 얘들 뭔가 예술하는 애들 같네..
내가 문이 잠기지 않는 욕실에서 찬물에(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서)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왔을 땐, 비는 이미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에 대고 잠들어 있었다. 나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하아.. 힘든 하루였어. 그냥 스르르 눈이 감겼던 것 같다. 오랜만에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꿀 잠을 자고 있는데..
일어나, 우리 환전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 '환전? 어딜? 그 언덕을 다시 내려가? 오늘? 난 싫어. 못해! 아이씨, 아까 그냥 공항에서 150에 할 걸 그랬어. 차라리 그냥 저녁을 굶자. 밥은 내일 먹으면 되지, 뭐. 환전도 내일 하고.' 이미 충분히 길었던 하루의 끝을 내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아직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표지 사진 : 알제리 행 비행기에서 착륙 전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