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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의 첫날밤

이야기, 둘

by 방자

현실을 부정하듯 나는 못 가겠다는 몸짓의 나를 측은히 여긴 비가 '그럼 나 혼자 다녀와?'라고 아마도 마음에 없을 이야기를 건넸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진심을 담아 '응. 내가 루이스에게 어디 가서 바꾸면 되는지 물어봐줄게.'라며 양심도 없이 그의 제안을 덥석 받았다. 낯선 곳, 땡볕 아래 그를 홀로 내 보내기로 한 것이다.


작업 중인 루이스와 친구들에게 다가가 환전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내게 <블랙마켓> 알려주었다. 조심스럽게 여기서는 환율차가 커서 은행에서 합법적 환전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아마도 암시장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합할 블랙마켓 시세는 신문에도 나올 정도로 보편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주 신문을 펼쳐 보여줬는데, 거기에는 1달러에 164 디나르라고 적혀있었다. 난, 1달러에 108 디나르를 받았는데. 은행가보다 1.5배나 더 지불하는 블랙마켓의 시스템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공항에서 120에서 150까지 제안하던 그들의 행동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구글맵을 켜 나에게 매우 복잡해 보이는 가는 길을 알려 주려다 루이스는 자신도 친구를 만나러 곧 나갈 거라면 가는 길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정말? 나는 비에게 했던 모진 말을 뒤로한 채, 차를 타고 나가는 거라면 함께 나가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내 상상, 기대, 혹은 착각과는 달리 루이스는 우리를 차로 태워다 주지 않고 목적지까지 우리와 함께 걸어주었다. 나는 왜 태워다 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집까지 오는 지도에 없는 샛길들을 친절히 알려주고 자신의 개인사(아버지는 아랍어와 프렌치를 모두 쓰는 알제리 프랜치지만 본인은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고 작년에 알제에 오게 되었다는)와 일(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래픽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역시, 예술가가 맞았다) 이야기를 해주어서 썩 먼 거리였음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우리는 루이스 덕에 ICI-FLEXY(아마도 핸드폰과 관련된 말인 듯)라고 쓰여있는 작은 상점에서 1달러 160 디나르라는 좋은 가격에 환전도하고 핸드폰의 데이터도 빵빵하게 충전했다. 그곳은 밖에서 보기엔 뭘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담배도 팔고, 신문도 팔고, 카피도 해주고, 이렇게 핸드폰 충전, 환전 등 온갖 삶의 자잘한 일들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이런 상점들이 여기저기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문화를 모르면, 말을 모르면 절대 찾기 어려운 곳 같기도 했다. 루이스 덕에 새로운 나라에 가면 해야 하는 두 가지 번거로운 일을 일타쌍피로 해결한 것이다.


이제 아주 여유롭게 동네 구경을 하다 먹거리를 사 가지고 돌아가 루이스가 초대한 저녁 송별회 파티(루이스는 오는 토요일에 파리로 돌아간다)에 참여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이따 보자는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시장의 위치를 안내받은 후 헤어졌다. 헤어진 직후, 루이스가 알려준 시장 방향으로 갔지만 시장은 찾지 못했다. 아니 시장이긴 했는데 먹을거리가 팔지 않았다. 아니 모르겠다. 그냥 헤매었다. 그러다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먹고 싶다는 비의 말에 카페를 찾기 시작했고, 구글 맵에도 나와 있는 카페 사인을 찾아 여기저기 가봤지만 뭔가 어두침침하고 담배연기가 자욱한 환경을 견디지 못해 나왔다. 이 곳엔 우리가 원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파는 곳이 없는 것일까? 골목을 헤매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한 얼굴로 우리에게 '니하오'라며 인사를 건넸다. 여기 중국인이 많은 건가? 어렵사리 찾아간 알제리 베스트 카페로 보이는 세컨드 컵(캐나다에도 같은 브랜드의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있어 잠깐 기대했다)에서 메뉴에 그림으로만 있고 글로는 보이지 않는 아이스커피 두 잔을 시켰으나 아주 달달한 아이스 모카가 나왔다. 가격은 두잔에 600 디나르(왠지 현지 물가 기준에 비싼 것 같다는 생각이 듦).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의 현실이 참 녹녹지 않다. 뭔가 이해보다는 궁금증만 늘어가는 듯하기도 하고.


희망과는 달리 물 밖에 (그래서 물만 큰 거 2개 작은 거 2개, 네 병이나) 구매하지 못한 우리는 다시 험난한 언덕길을 올라 숙소로 돌아왔다. 루이스와 친구들은 파티 준비가 한창이다. 뒷마당에 발이 쳐지고 우리 방에 있던 작은 매트가 동원되어 나갔다. 마치 운치 있는 파티를 후원한다는 듯이 곧 정전이 되었다. 뒷마당에 촛불을 켜고 둘러앉았다. 우리는 빈손임이 미안했지만 그들이 매우 환영해주었으므로 쑥쓰럽지만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얻는 꼴로 함께 앉아 하나둘씩 도착하는 루이스 친구들의 인사를 볼뽀뽀 인사를 받으며, 맥주와 와인, 고기와 야채 구이, 샐러드를 차례로 얻어먹었다. 새로 오는 사람들은 '싸~바?'라고 인사를 했다. 'How are you?'같은 말이라고 한다. 우리까지 거의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고 나름 흥에 취해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사실 우리는 전혀 불어를 못했고, 그들 중 영어를 하는 사람은 루이스 (사실 그녀의 영어도 매우 제한적 단어와 문장 수준이다) 밖에 없었으므로 우리의 소통은 매우 시각적이고 유치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자리를 통해 꽤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예술계통에 일하고 있었다는 것과 (역시, 예술가 필이 나더라니) 사하라 사막이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도시들이 많고 예쁘다는 것(사진을 많이 보여주었다), 전형적인 알제리안이라고 한 그 자리에 있던 애들이 내 생각과는 달리 흑인이 아니라 흠.. 백인(?)이라는 것, 술은 매우 한정된 곳에서만 팔아 구하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 얘들이 쓰고 있는 말은 프렌치와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알제리 고대어)의 세 개 언어가 섞여 있다는 것 등. 물론 대부분 직관과 추측, 약간의 상상력이 가미된 정보라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첫날의 수확치고는 나름 만족할 만한 수준인 것 같았다. 우리는 11시가 넘어 피곤을 핑계로 방으로 들어왔지만 밖에서는 새벽 2시가 다되도록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괜스레 듣기만 해도 흥이 나는 예술가들의 파티, 거기에 함께했다니 좋다. 시끄러워도 괜찮아. 더워도 괜찮아. 전기가 안 들어와도.. 그냥, 빨리 자면 되지 뭐. 모든 게 나쁘지 않은 배부른 첫날밤이다.


<표지 사진 : 루이스네 집 뒷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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