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법체류의 서막

이야기, 셋

by 방자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다. 너무 더워서 창문을 열자 바람과 함께 모기들이 방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여기저기 가려워 편히 잘 수가 없다. 불이 켜지질 않아 핸드폰 라이트를 들고 화장실에 갔는데 변기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물이 나오질 않는다. 직관적으로 변기에 그려진 그림이 '그냥 싸고 뚜껑 덮어놔'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덥지만, 괴롭지만 다시 침낭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한다.


아침에 뚝딱뚝딱 소리가 나더니 전기가 들어왔다. 뒷마당에는 어제 자신을 영화 무대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루이스의 친구 라바흐가 매트에 누어 자고 있다. 어느덧 해가 쨍쨍한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루이스는 전기와 물 문제가 미안하다며, 전기는 고쳤고 물을 빨리 고쳐보겠다는 메시지를 종이에 영어로 삐뚤빼뚤 적어 놓고 나갔다. 다른 한 친구와 이 문제를 해결하러 나간 모양이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새 물 한 병이 텅텅 비어있다. 아마 애들이 목이 말라 마셨나 보다. 남자 친구는 물이라도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고, 나는 물을 두병 사 두어서 (그리고 한병만 냉장고에 넣어 두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분이 많이 땡기는 한 여름이다. 우리는 오늘 그의 인식에 <알제리>라는 나라를 심어 준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물이 나오질 않아 그냥 물티슈로 얼굴과 팔, 다리를 쓱쓱 닦고 집을 나섰다. 찝찝하긴 하지만 아직 냄새가 날 정도는 아니겠지?


오늘은 금요일, 알제리에서는 일주일을 시작하는 날(우리의 일요일, 혹은 종교적으로 주일 같은)이라고 한다. 지인을 만나기로 한 스퀘어에서 한참을 사람들을 보며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오가고 서로 인사를 나눈다. 그 중 일부는 시원해 보이는 길고 하얀 치마 같은 옷(내가 이슬람 종교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을 입고 있다. 이곳은 마치 쉬는 날 만남의 광장 같은 느낌을 준다. 바로 앞 과일 가게에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무화과 몇 개를 샀다. 실한 놈 6개에 160 디나르를 지불했다. 앗, 1달러네. 새로운 환율을 적용해 나는 머리 속 계산기를 100 디나르 = 1달러에서 150 디나르 = 1달러(실제는 160이지만 계산이 쉽게)로 고치기로 했다. 물은 큰 거 한 병에 30 디나르였고 무화과는 1KG에 400 디나르라고 하니 물가가 저렴한 편인 듯하다.


우리는 지인(앞으로 완님이라고 부르겠음)의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이동했다. 완님은 내가 잘 아는 분은 아니지만 한 3년 전쯤 일하던 공간에서 만나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알제리에서 조경 쪽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고, 나와 비가 만난 곳에서 진행하시던 <나만의 정원 만들기> 프로그램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알제리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거의 2년 만이다. 비는 그때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들었던 알제리 이야기들이 인상 깊었고, 그래서 알제리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제리를 비자 신청에 지인의 초대장이 필요한지라 완님이 우리를 초대하는 형식으로 도움을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집으로 가는 길,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다 오늘이 비자 입국 만료일이어서 어제 들어오게 되었고 9월 15일에 나갈 예정이라고 했더니 완님은 비자에 쓰여있는 날짜가 오늘이면 오늘까지만 머물 수 있는 건데라며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비자에는 당연 불어와 아랍어만 적혀있다. 우리는 당연 대부분의 국가들처럼 비자 만료일 내 입국, 입국 후 허가받은 체류기간(우리가 가진 비자는 체류기간이 30일) 동안 체류 가능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알제리는 내가 알고 있던 비자 상식과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모양이다.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그리고 도착해서 이런저런 검색을 해본 비는 완님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아니 근데 왜 어제 공항에서는 우리한테 질문도 없이 우릴 그냥 들여보내줬단말인가? 우리의 비자 만료일은 오늘이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내일부터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이다.


하아, 이건 뭐지.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넘어야 할 큰 산 하나를 만난 기분이랄까.


이야기를 읽고 우려하실 수 있으나, 우려의 댓글은 제게 정신적 타격을 줄 수 있으니 자제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최대한 솔직하고 현장감 있는 실시간 글을 지속적으로 써 나갈 수 있을 거 같아요. :)



<표지 사진 : 나름 유명 건축가가 지었다는 AEROHABITAT(공중주택)에서 본 알제리 전경, 지인분의 안내로 편도 10 디나르씩의 엘리베이터 이용료를 내고 올라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찍은 사진>



다음이야기 : 선택의 기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알제의 첫날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