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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듬 Oct 03. 2023

털밍아웃

털 많음을 고백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뗀 사회 초년생에게 서울의 월세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대학교 친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살게 되면서 맞춰가야 할 것도 많고 각자 어떤 물건들을 공유할지 정해야 하는 것도 많았지만 나는 무엇보다 털밍아웃이 우선이었다. 


적어도 1년간은 함께 살아야 하는 친구가 나의 털을 보고 놀랄(?) 것을 대비해서 미리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살기로 시작한 날은 겨울이라 몸엔 털이 수북하게 자라 있었고, 털을 밀지 않으면 거칠 거리는 팔, 다리와는 달리 진한 털 하나 없이 보들거리는 피부를 가진 친구였다. 


앞으로 같이 살 동네는 어디로 잡으면 좋을지 이야기를 하다가 운을 떼었다. 


"나 고백할 게 있는데..."

"뭔데?"


나는 살짝 긴장한 채, 옷소매를 걷어 털이 수북한 팔을 내보이며 말했다. 


"털이 많아서 좀 고민이야" 


그러자 친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난 또~ 그게 왜?"라고 했다.


놀라거나 걱정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반응에 안도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실에 비하면 털은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와 같이 살면서 친구 때문에 제모를 하진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내 제모는 항상 누군가의 시선을 우려하여 밀었던 것이기도 했다. 


어렸을 적 친구들의 놀림은 나에게 큰 상처였고 제모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또 제모를 하지 않고 긴소매를 걷고 지하철에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 앞에 있는 남자의 시선이 내 팔에 닿자 남자가 흠칫 놀랐던 경험이 있어서 그때 이후로 다시 위축이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과민반응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보통 사람들의 반응일 것이라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고, 이후 애인이 생겼을 때도 털이 많다는 것을 숨겨야 하나 걱정이었다. 


20대 초반까지는 남자친구들에겐 절대 고백하지 않았다. 만남이 있기 전날엔 항상 제모를 했고 조금이라도 까칠한 털이 올라올 까봐 전전긍긍했다. 물론 덜 밀린 털을 보면서 예상은 했겠지만, 절대로 내 입으로 콤플렉스를 고백하진 않았다. 하지만 20대 후반에 접어들고 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면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남자친구는 털이 적은 편이었기 때문에 고백이 조금 더 두려웠다. 사귀기 초반,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고백을 했다. 조금이라도 싫어하면 마음을 빨리 접을 수 있게 말이다.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고민 끝에 털밍아웃을 했다. 


"그게 왜? 별로 상관없는데?"


나는 수북한 털을 보이며 이래도 괜찮아?라고 했지만, 팔을 잡으며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해주어서 안심이 되었다. 


그래 이까짓 털이 뭐라고, 뭐가 어때서 나는 내 몸의 털들이 자라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던 걸까...


이후 제모 시간을 줄이고, 스트레스를 덜 받았다. 오랜 시간 고민했던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 안도했다. 그리고 나의 털밍아웃에 별것 아니라고 긍정적인 반응을 해준 두 사람에게 매우 고마웠다. 


그 이후로 털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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