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AsianHate
혹시라도 봉변을 당하면 어떻게 맞서 싸울지 계획을 세워둬야지.
까르르,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체 카톡방에 14시간의 시차를 두고 답이 올라왔다. 발신인은, 남을 웃기는 일에서 큰 기쁨을 얻는다는 M이다. 나를 만나면 둘둘 말은 종이를 귀에 갖다 대고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아이 대하듯 안아도 주고, 업어도 주는 친구, 나의 진지함을 비웃고 놀려먹는 유일한 사람이다. 고교시절에도 매일같이 붙어 다녔지만, 이방인의 삶을 공유한 이후에는 서로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게 되었다. 나는 속했던 곳으로 돌아왔고, 그녀는 반쯤 걸쳐진 그곳에 남았다. 뿌리를 내렸다. 그런 그녀가 맞서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M에게
밤새 올라온 너의 메시지를 읽었어. ‘봉변’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어. 별 일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나 봐. 내가 전에 시카고에서 당했던 봉변에 대해 이야기했던가?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내가 너보다 한 해 늦게 미국에 갔잖아. 그때 혼자가 아니었어. 연구실 단짝 친구 S랑 한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출국했거든. 각기 사랑하는 사람을 한국에 두고 떠나는 닮은꼴의 길을, 우리는 함께 경유했어. 인천에서 도쿄까지. 나리타 공항에서 비싼 라멘을 한 그릇 먹고 다시 시카고까지. 시카고에서부터는 각자의 길이었어. 내가 살았던 대학 도시는 촌스럽게 친절하고 허탈하게 소박했어. 나는 그게 그렇게 좋더라. 네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도 내가 살던 그곳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해봐. 도시의 대표색인 진노랑과 검정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길을 걷다 마주칠 때마다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었어. 마치 그렇게 인사하려고 길을 나선 사람들처럼 저 멀찍이에서부터 눈웃음을 발사하면서 인사를 했어. 낯선 사람 둘이, 마침내 스쳐 지나갈 때까지 10분 같은 10초를 서로 바라보며 걸어가는 일이라니. 강의를 듣는 일보다 에너지 소모가 더 크게 느껴졌어. 하지만 좋았어, 그런 친절함이. 소박한 도시에서, 친절한 사람들과, 웃으며 나눌 수 있는 이야기 이상의 것을 나누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나만 그런 건 아니었던 가봐. 지독한 외로움에 맛본 S와 나는 독립기념일이나 추수감사절이면 시카고에서 만났어. 시카고는 우리의 교차점이었어. 종일 연구실에만 박혀 몇 달을 보낸 두 개의 얼굴은 전보다 뾰족해져 있었는데, 그래서 늘 반가운 마음보다 측은한 마음이 앞섰나 봐. 낮에는 주린 배를 채우고, 빠싹 말라비틀어진 감성을 촉촉하게 하려고 애썼어. 딥 디쉬를 사 먹고, 미술관을 돌아다녔어. 밤이면 끝도 없이 수다를 피웠지. 시카고에 있는 재즈바에 가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 ‘봉변’을 당하기 전에도, 도시의 밤거리는 우리에게 너무 위험한 곳이었거든. 이른 저녁을 먹고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숙소에 돌아갔어.
2010년 11월 23일, 추수감사절 때의 일이야. S와 나는 늦은 오후 반갑게 만나 저녁을 먹었어. 밖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어. 숙소까지 택시를 타기로 했어. 여행 경비를 아끼려고 프라이스라인에서 호텔 비딩을 했는데 번화가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호텔에 턱 하고 예약이 되어버린 거야. 추수감사절이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이잖아. 연휴 첫날의 거리에는 차도 거의 다니지 않았어. 이제와 떠올려보니 처음 택시를 탈 때부터 S와 나는 긴장상태였던 것 같아. 만나면 멈출 줄 모르는 대화가 뚝 끊겼어.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서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어. 도착하면 1초 만에라도 문 밖으로 튀어나갈 수 있게 채비를 한 상태로 말이야. 택시가 신호 대기에 걸려 멈췄어. 그때 우리는 편도 4차선 대로 중 3차선 위에 서있었는데, 인도를 지나던 취객 두 명이 우릴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했어. 빨리 신호가 바뀌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택시 기사 아저씨가 창문을 열더니 응수하기 시작했어. 두 명의 취객은 차로로 뛰어들어서는 택시를 몸으로 밀쳤어. '아, 제발! 제발! 이곳을 빨리 벗어나게 해 주세요!’ 빌고 또 빌었어. 그런데 벌컥, 택시 기사 아저씨가 차문을 열고 내렸어. 몸싸움이 시작됐어. 이쪽저쪽으로 떠밀려 덜컹이는 택시 안에서 S와 나는 흔들렸어. 출동한 경찰이 택시 쪽을 향해 총을 겨눌 때까지. 상황이 진정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그냥 무작위 공격이었을지도 몰라. 행패를 부린 사람들이 젊은 백인 남성이었다는 점이나 택시 기사를 포함해서 택시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유색인이었다는 점은 그저 우연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동물적으로 알았어. 아주 불리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경찰이 떠나고 택시 기사가 차로 돌아오자마자, S와 나는 급히 택시비를 치르고 혼비백산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어. 세상에, 하루 숙박료가 250불도 넘는 호텔이었어. 하지만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어. 털썩, 각자의 침대에 앉아 우리는 조금 울었던가? 맥없이 앉아 있다가 정신을 추스르고 TV를 틀었어. “Bombardment of Yeonpyeong”이라고 쓰인 원색의 헤드라인 위로 미간을 좁힌 앵커가 남한과 북한이 전쟁 준비 태세에 들어간다고 격양된 목소리로 전하고 있었어.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어. 뇌가 흔들렸어. 처음에는 두개골 속 뇌만 출렁이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온 세상이 흔들렸어. S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한국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시도했어. 세상에나, 그날 밤을 S와 내가 어떻게 견뎌냈는지 이후의 기억은 공백이야. 하지만 그 날의 충격은 뇌가 흔들리는 감각으로 내 몸에 깊게 새겨졌어.
이후, 자잘한 일상적인 위협들을 경험하면서 그 감각에 익숙해져 갔어. 입국할 때 여권에 끼워주는 I-94 있잖아. 이제는 없어졌지만. 그걸 잃어버려서 국제교류 본부에 상담을 요청했는데 본부장 할아버지가 "그 서류 며칠 내로 못 찾으면 너는 당장 너희 나라로 돌아가야 해!”라고 윽박질렀어 (수수료만 내면 언제고 재발급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패닉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기차역 주변 노숙인들이 내 손을 잡아 끌어내릴 듯 제 팔을 휘저으며 뒤를 쫓아온 적도 있었어. 그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덜컥 겁이 났지만, 뇌가 가볍게 흔들리긴 했지만 익숙해지니까 잠깐 그러다 말았어. 전에 우리 같이 낚시하러 갔을 때 생각나? 총 들고 나와서 우리 보고 꺼지라고 하던 그 백인 할아버지 말이야. 난 그 할아버지가 했던 다른 말은 벌써 다 잊어버렸는데, 위협하는 몸짓으로 "너희가 그 땅에 대해 무얼 알아?”라고 소리쳤던 게 기억나. 그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비현실적이었는지, 연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어. 외화에 나오는 딱 그런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자 같았잖아. 그래서 모욕을 당하고도 그렇게 가만히 있었나 봐. "차별이야 워낙 보편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변화를 못 느낀다"는 네 말처럼, 일상이었어.
아시아인라서, 여성이라서, 아이라서, 노인이라서. 그것들의 교차지점에 서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범죄의 타깃이 된다는 게 말이 돼? 이들의 공통점이라고는 고작해야 상대가 화내면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게 없는지 먼저 살피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뿐 아닐까? 너무 물러서 타깃이 되는 건가? 머릿속에 욕이 떠올라.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 아닌 소리들, 의미를 모를 뿐 아니라 소리값조차도 분명하지 않은 찌꺼기들 말이야. 너 혹시 알아, 나 욕 못하는 거? 이렇게 머리로는 떠오르는데 아직 입 밖으로는 소리 내보지 못한 거. 가끔은 내가 정말 학부시절 어느 선배의 말처럼 온실 속 화초가 아닐까 싶기도 해. 고등학교 1학년 음악시간에 말이야. 우리 알토 리코더 연습 열심히 하던 시절이잖아. H라고, 당시에는 문제아로 찍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명랑하기만 했던 아이가 있었어. 합창 연습한다고 교실 앞에 나가 쭉 줄을 서는데 H가 나를 밀치면서 “비켜, 씨바!”라고 한 적이 있어. 그러고 나서 상황이 어떻게 됐는 줄 알아? 너무 놀란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H는 더 놀라서 막 미안하다고 사과했어. 아, 창피해. 이따금 그때 일을 떠올리곤 해. 나, 필요한 때 일갈할 수 있는 욕설을 하나쯤은 꼭 익혀야 하는데. 약자를 향한 뒤틀린 혐오에 편승하지 않으면서 저열함만을 세게 타격하는 욕설, 나는 그런 걸 찾으면 우리 아이들에게도 장착시킬 계획이야.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느냐는 말이야. 나는 정말 모르겠어. 길을 잃은 기분이야. 넌 그럴 때 어떻게 해? 난 검색을 해봤어. 우린 21세기 구글러니까. 77억 지구인 중에 반 이상이 인터넷을 사용한다는데 뾰족한 수 하나 없겠어, 하면서. 난감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가 쓴 글을 읽고 실마리를 조금은 찾은 것 같아. 버틀러는 혐오 발언자/혐오 범죄자가 '혐오의 2차 저자'라고 말해. 선행하는 관습의 반복이라는 보다 근원적이고 문제에 집중하라고 말해. 관습의 전복을 위해 버틀러가 내린 처방은 이거야. "언어의 전유와 전복을 통한 저항.” 혐오 발언을 비틀어 받아치라는 거야. 상상해봤어. 위급할 때 사용할 뼈 때리는 적확한 욕설 몇 개를 품은 우리, 말을 비틀고 받아치는 기술을 밤낮으로 갈고닦는 우리를 말이야. 포효하는 짐승처럼 폭력성의 가슴을 할퀼 사나움과 세상을 비틀 유쾌함을 키워간다면, 너의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가, 우리의 목소리가 모두 그렇게 한다면 훌러덩 세상이 뒤집히지 않을까?
2021. 4. 6 계절에 맞지 않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고 커피를 홀짝이며, 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