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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Jul 14. 2018

혐오의 시절?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한 격변의 시절?


2016년 강남역에서 벌어진 여성 살해 사건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혐오'라는 단어와 빈번히 마주치게 된 것 말이다. 물론, 오늘날의 나는 더 이상 매일 아침  종이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현관을 나서던 대학시절의 내가 아니다. 그날그날 포털 메인에 올라온 주요 기사 몇 개, 페친들이 공유한 눈에 띄는 기사 한 두 개를 읽어보는 정도에 그치는, 저녁 식탁 남편의 이야기에서  놓친 뉴스를  확인하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그다지 밝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는 강남역 살인사건이 '혐오'의 시발점으로 다가왔다. 단순한 선택 편향이었을까? '혐오'라는 표현은 이후 기사들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어느 한 날, 기사에 인용된 '일베(일간베스트)'와 '메갈(메갈리아)'의 거친 발언을 읽다가 '어, 우리 사회에 여성과 남성에 대한 혐오가 정말 이렇게 팽배했던가?' 생각했다. 그래서 돌아보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여성으로서의 나의 경험을. 살면서 겪은 크고 작은 차별의 기억들, 교육과 문화가 내 무의식에 새겨놓은 움츠림은 금세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래된 기억들이었지만, 가려져있던 의식이었지만, 그 순간의 감각은 생생하고 선명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혐오'와 닿아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대상화'를 기저로 한 비뚤어진 관심, 요청하지도 않은 이상한 배려들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랬었지. 어린 날의 나에게 '여성'이라는 옷은 그렇게 '축복'이 아닌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버렸지.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는 '맘충 혐오' 기사를 읽었다. 둘째 아이 출산 후 아직 어리기만 한 두 아이들을 데리고 씨름하던 때의 일이었다. 기사에는 '맘충'의 의미가 친절하게 쓰여있었고, '맘충 혐오'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어린 자녀를 둔 엄마들이 공공장소에서 민폐를 끼치는 존재들, 직장인들이 출근한 낮에 한가하게 카페를 드나드는 존재들로 묘사되어 있었다. 나도 '맘충'인가?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전업맘 + 아이 둘 + 가끔 동네빵집 이용'의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했던 것이다. 아이를 키우느라 애쓰는 나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엄마의 관심을 동생과 나누는 법을 배워가는 첫째 아이를 위해 보드라운 식빵과 딸기주스를 선물하는 우리들의 빵집 타임, 그것은 그 시절 아이와 나의 소확행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 우리와 공간을 공유했던 다른 누군가에게 나는 '맘충'이었을까? 육아에 여유가 생긴 지금이었다면 '내가 당당하면 됐지.'라고 넘겼겠지만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던 그 시절의 나는 잔뜩 위축되어 이삼주에 한번 꼴로 갖던 빵집 타임을 멈추었다. 혹 다른 일로 외출을 하게 되면 지나치게 조심하고 과도하게 훈육했다. 


'With You'로 함께 아프다가, 남북평화의 바람을 타고 희망을 노래하는 날들을 보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혐오'와 다시 만났다. '남성 혐오', '난민 혐오'. 혐오와 혐오가 촘촘하게 옥죄어 들어왔다. 우리 사회는 정말로 이런 '혐오'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나와 당신, 우리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혐오'당하는 존재들인가? 우리 그저 오랜 억압의 시간이 만들어낸 뒤틀림, 그리고 시작된 균열을 목도하게 된 하나의 세대는 아닐까? 아니, 어쩌면 우리 사회가 겪어내고 있는 사회적 통증들을 치유할 기회를 잡은 도약의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인종, 국적, 성별, 종교, 정치적 견해, 신분이나 지위를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단계로 훌쩍.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그다지 밝지 않은 나에게는 "혐오"라는 단어가 자꾸 걸린다. 내 눈에는 "혐오"가 다른 "혐오"를 낳는 것으로 보인다. "혐오"라는 말의 덫에 걸려든 꼴이랄까? 사회현상에 더 밝은 전문가라면  훨씬 다층적인 분석을 내놓을 텐데 답답할 따름이다. 나는 그저, 마치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위험상황인 것만은 분명하게 인지한 어린아이처럼 외쳐본다. 


조심해요, "혐오"가 우리를 '반목의 세계관'으로 인도하고 있어요!


그리고 전해 본다. "조지 레이코프 선생님이 그랬는데요. 프레임을 다시 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할 일이래요. 특히 기자들이요. 선생님이 그러는데 특정 프레임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들려주고, 그런 식으로 쟁점을 정의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오랫동안 써먹어온 전략이랬어요. 이러한 반복을 거치면서 그들의 언어가 정상적인 일상 용어가 된대요. 그렇게 그들의 프레임이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사고방식이 되는 거고요. 기자들이 이걸 똑똑히 깨닫고 여기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댔어요.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특정 프레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자들의 의무예요. 또 프레임에 대해 공부하고, 겉보기에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있는 프레임을 꿰뚫어 보는 법을 배워야만 해요. 명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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