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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Jun 22. 2021

점프수트로 시작된 이야기

이야기의 시작은 점프수트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깊은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는지 이제 겨우 생각이 났다. 나는 짙은 먹색의 점프수트를 입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다가오면서 마주한 거울을 통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옷 불편하지 않아요?”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삼십 분가량 끊김 없이 이어졌다.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는데 속으로는 어리둥절했다.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하는 마음이었다. 평소의 그녀는 묵묵하게 머리만 다듬어 주는 편이었다. 미니멀하고 세련된 패션 스타일과는 다르게 과묵하고 투박했다. 침묵을 덮기 위해 시도되는 피상적인 대화가 싫어서 미용실에 잘 가지 않는 내가 그녀를 찾아간 이유였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그녀가 살아낸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담 세션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다. 이제와 후회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세상을 향해 감행하기 시작한 작은 보복에 관한 이야기였다. 짐작이 되는 시간들, 헤아려지는 마음들이었다. 나는 그녀의 가위에 머리칼을 내맡긴 채 짧은 탄식과 긍정의 말들로 공감을 표했다. 돌이켜보니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나아간 건 순전히 점프수트 때문이다. 화장실 갈 때는 불편해서 어떻게 하냐는 궁금증을 일으킨 점프수트 말이다. 지퍼로 된 디자인은 크게 불편하지 않다고, 안쪽에 브라탑을 입으면 그녀가 걱정하는 벌거벗은 느낌은 피할 수 있다고 나는 답했다. 그녀는, 사실 가게 문을 여는 9시 반부터 문을 닫는 7시까지 화장실에 한 번도 가지 않는 날이 많다고 고백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서 이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느낀다고 했다. 아, 나는 그런 공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또 모르지도 않는다. 과로를 부추기는 사회, 일하다가 죽어가는 노동자들. 우리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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